사포자를 위한 사랑소설 4
1년 정도 일본에서 지낼 일이 생겼더랬다. 출국일을 기다리며 내가 가장 공들여 한 일은 책장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민도, 이사도 아니었고, 고작 1년 간의 외유이지만 내게는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름대로 일종의 의식 같은 걸 치른 셈이다. 직장생활 10여년 만에 출근과 마감이 없는 ‘미지의 세계’에 간다! 그때는 정말이지 너무 설레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충분히 의식정도는 치를만 했다.
책장 정리는 한 시절을 함께 통과했던 옛 책들을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를 줬다. 특히, 내 지난 연애, 사랑과 관련된 책이 눈에 들어오면 더 그랬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도 그 기분, 그 마음은 소환 가능하니까. 그래, ‘읽는 것’만으로 말이다.
책 따위 가져가도 안 읽는다는 경험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리바리 책을 쌌다. 책장에서 만난 내 인생의 소중한 조각들을 담아가고 싶었다. 대충 리스트를 읊자면 이렇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일까’ ‘그 남자네 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영화로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새로운 고전이다. “너 자신을 용서해”라는 말에 감명받던 ‘나’는 이제 없지만, 새로운 ‘나’는 이 대사를 일본생활의 주제어로 삼았다. “때로는 균형이 깨져야 삶의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어.” 출근을 멈춘다는 것, 당시 내 삶에 가장 거대한 균열이었다.
냉소가 사랑의 가장 큰 적임을 알려 준 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였다. 일상의 의문들을 도식화하고, 연인들의 머릿속을 열어본 듯한 그림까지 등장시키는 이 지적인 소설은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낭만적이었다. 책은 사랑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다른 눈을 뜨게 해 줬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한 장 한 장 옛 연인과 함께 읽은 기억들이 빼곡했고,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주인공의 발칙한 연애방정식에 ‘옳다’ 혹은 ‘그르다’며 만날 때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던, 어느 면에서는 그 주인공들을 닮아 있던 ‘우리’ 말이다.
그런데, 내가 도쿄(東京)에 사랑 소설 리스트만 들고 간 건 아니다. 당시 나는 우스갯소리처럼 “사주에 물이 없어 남자가 없는 팔자다”라는 한 선배의 충격적인 사주풀이 (농담이리라 믿는다) 때문에 물 많은 섬나라에 간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를 ‘사포자’로 여기던 친구들은 이 용단(?)을 환영했고, 학교에서 연하남을 꼬셔봐라, 인생 뭐 있냐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등 모든 게 ‘남자’로 수렴되는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그에 부응해 미션 리스트를 만들었다. 1. 여행지에 혼자 온 남자와 친해지기 2. 남자 바텐더가 있는 조용한 바의 단골 되기 3. 좋아하는 사람과 가장 좋아하는 것 하기. 아, 소박하다. 물 많은 나라니까, 이 정도는 허락하겠지라며.
물은 응답했는가. 사랑 소설 리스트는 마법을 부렸는가. 궁금하면 다음 칼럼도 읽어주시라. 남의 연애 이야기에 슬쩍 ‘기특한’ 이야기가 끼어 있을지도.
한데, 나는 앞선 사랑 소설을 전부 일본에 버리고 왔다.
짐이 늘어난 탓이지만, 이제 또 새로운 리스트를 써야 할 때니까.
나는 나의 것을, 당신은 당신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