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초짜 엄마의 좌충우돌 봄날 찾기
너 낙서하지 마! 이제 낙서 금지!
지호 눈이 휘둥그레하다.
나도 속으로 되뇐다.
'나 또 왜 이러니'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과 달리 또 입이 터진다.
기껏 글자 가르쳐 놨더니 사방팔방 낙서하다가 글씨가 엉망이 됐어.
글자 갈겨쓰지 말라 그랬지?
아침에 먹은 수박이 상했나. 점심에 먹은 떡볶이가 소화가 안됐나..
그래 떡볶이다. 40 넘으니 소화도 잘 안 되는 데 밀가루를 먹어가지고 그래.. 그런 거야
지호에게 낙서란 요즘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일과 중 하나이다.
학교 복습노트에서 시작한 낙서는 노트를 거쳐 전자노트를 해 먹고 이제는 책장의 모든 책을 꺼내 페이지마다 낙서를 하고 있다.
낙서의 주된 내용은 만화 대사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많고..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니 글씨가 날아간다.
원래도 한석봉은 아니었지만 알아볼 정도는 됐는데
점점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 간다
처음 글씨를 쓸 때 노트 반쪽에 한 글자를 정확히 썼을 때 나는 말했다
됐어. 이제 니 맘대로 써. 너무 잘했어.
희한하게 읽기는 되는 아이가 쓰기가 안되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옆에 따라 그려보라고 해도 그게 안되는 거다.
이건 뭐.. 어디부터 해야 하는지..
초등학생이면 이름은 써야 한다는 어디서 구르다 내 머리에 박힌 돌댕이 같은 말 한마디에 나는 급행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 열차는 몇 번의 폭주기관차가 되어 탈선을 했다.
그렇게 동그라미도 못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보며 나는 망했다를 되뇌었다.
이름은커녕 ㅇ도 못쓰다니 학교 생활을 앞으로 어찌해나간단 말인가
하지만 나의 염려와 달리 글자를 못써도 학교 생활은 망하지 않고 흘러갔다
심지어 장애가 없는 같은 반 아이도 글자를 못쓰는 아이가 있었다
다행인가 저 엄마는 나보다 더 한심한 엄마인가를 고심하던 어느 날 지호가 연습노트에 크게 한 글자를 썼다? 그렸다?
지
지렁이가 가듯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선이었지만 분명 지 였다.
그날 나는 분명히 말했다.
됐어. 이제 니 맘대로 해. 너무 잘했어.
지호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늘 눈을 부라리며 낙서하지 마라고 외치는 내가 같은 사람인 줄 모를 테니.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갑자기 잠자코 보던 지호의 글자가, 낙서가 꼴 보기가 싫어졌을까
장애인도 진로라는 게 있다
얼마 전 진로직업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막연했던 것과 다르게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아주 멀지 않은 이야기였다
감명 깊은 세미나 뒤에 주위를 보니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악기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에 있는 아이, 운동을 좋아해 선수반에 있는 아이, 그림을 그리는 아이, 요리를 하는 아이... 아무튼 우리 아이들도 뭔가를 꾸준하게 열심히 하고 있었다
흠.. 생각보다 잘하네. 저렇게 못하는데 안 그만두고 열심히 하네. 쟤는 뭘 너무 많이 하네. 저런 특이한 것도 하네를 뒤에서 담화하고 보니 지호가 보인다.
지호야 책 읽을까?
책 읽기 싫어요
지호야 영화 보러 갈까?
영화 안 볼 거야!
지호야 숙제할까?
나 혼자 할 거야!
그렇다. 사춘기...
그런 희한한 봄이 우리 집에 왔다.
가뜩이나 잘하는 건 없고 꾸준히 하는 것도 없는데 그나마 하던 것들도 다 하기 싫다 혼자 하겠다(=엉망으로 만들겠다) 안 하겠다를 외치는데.. 이건 뭐 대응책이 없다
어르고 달래도 봤다가 혼도 내봤다가 폭발도 해봤다가 사탕도 줘봤다가 다 해봐도 지호는 나의 끝을 보겠다는 듯 으르렁 거렸다.
이 놈 자식... 너도 진로라는 게 있다는데..
나도 널 뭐를 시켜야 할 거 아냐
너도 뭐 할 거를 찾아야 할거 아냐
이 생각을 하다가 낙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저 놈의 낙서.. 저거 하느라 시간 다 보내고 에너지 다 쓰고 책은 죄다 당근에도 못 팔게 해 놓고 네가 지금 그럴 때야? 그래도 글씨 하나는 읽어보게 쓴다고 했더니 이제 그것마저저저저.... 하다가
그럴 거면 하지 마! 기차화통을 삶아 먹은 소리가 터져 나와버렸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또 아이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하겠지
알고 있다. 모르지 않는다.
나 이래 봬도 엊그제 사춘기 아이를 대하는 방법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은 여자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 단지 공부해서 알고 있으니 후회가 좀 빠르다는 거?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이런 글이라도 쓴다는 거? 그게 공부해서 얻은 점이랄까
아무튼 지호는 나를 보며 또 시작이군 이란 눈빛으로 일단 안 한다고 했다
저러는 거 보면 사회생활을 제법 할 눈치는 갖춘 아인데... 싶다가
너무 말로만 지르는 걸 보니 역시나 내 딸이구나 한다
조급하게 마음먹어봤자 얻을 게 없다는 건 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지호의 취미생활과 해야 할 일 그리고 그 정도를 정해주는 것. 그리고 격한 거부감 없이 꾸준히 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하게 이거 저거 시킨다고 뿅 하고 나올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만큼의 재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큰 숨을 쉬어본다
후~~~~~
후~~~~~
후~~~~~
진정하자. 진정하고 일단 낙서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정도를 정해보자.
그리고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있는 묘안을 짜보자. 억지로 강제로 말고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방법.
아... 마법사였으면...
지호가 좋아하는 것과 아주 싫어하는 것, 단순히 귀찮아서 안 하려고 하는 것을 구분 지어 보자.
그 안에서 장기전으로 시도해 볼만한 걸 찾아보자.
그리고 화내지 않도록 노력해 보자
지호의 일상을 존중하고 최선을 알아채는 눈치를 챙겨보자
요즘 지호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나도 모르겠어 이다.
저 다짐들을 적용하려는데
정말 잘 모르겠다.
누군가 선을 쫙 그어서 긴 거 아닌 거 정리해 준다면 좋겠다
내 사춘기는 마냥 착했던 것만 같고
비장애인아이와 장애인아이의 사춘기를 어디까지 다르게 봐야 하고 어디까지 같게 봐야 하는지 경계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걸 시도조차 안 하는 거 같고
하지 말아야 하는 걸 하고 있는 느낌도 들고
문제행동은 나 때문에 생긴 것 만 같다
그래도 우린 자라나야 하니까 배우려고 애쓰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려 글도 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진짜 봄날이 오겠지
사춘기는 아이에게 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이에게도 그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도 봄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준비하는 시기인 것 같다
꽃피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도록 오늘도 거름을 뿌려본다
구구절절한 비겁한 변명도 쏟아내니 좀 시원하구나..
끄적거린 다짐도 좀 잊지 말아 보자 지호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