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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말과 생각

언어폭발기의 두 돌 아기

by 배경자

두 돌 즈음해서 언어 폭발기가 찾아왔다. 단어 위주로 옹알이하던 시기를 넘어 단어와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감동적인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몇 개 안 되는 단어와 조사들을 총 동원하고 입으로 웅얼거리면서 긴 문장을 하나씩 차근차근 완성해 가는 과정은 한 편의 종합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알려주지도 않은 단어도 불쑥불쑥 이야기를 꺼낼 때 보면 기특함을 넘어서 약간 조심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이 아이가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구나. 스스로에게 좀 더 고운 말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말은 곧 생각의 표현이라,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과 같다. 물론 생각은 진즉에 하고 있었겠지만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생각들은 나를 하루에도 수백 번씩 천국과 지옥으로 빠뜨린다. 아이와 함께 데굴데굴 바닥에서 구르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즐기던 놀이였기에 더 과격하게 놀아줄 요량으로 아이를 안고 같이 굴렀는데, 갑자기 아이가 아빠, 하지 마, 재미없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는 것이 꼭 즐거운 일 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그 뒤로도 아이를 안고 걸어갈 때 늘 흥얼거리던 노랫소리에 아이가 아빠 노래 부르지 마! 할 때마다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쌓여갔다. 매일 저녁 양치질과 샤워 후 머리 말리기를 할 때마다 도통 가만히 있지를 않는 아이에게 몇 번 호통을 쳤는데 그 뒤로는 아빠만 보면 무섭다고 해서 크게 좌절한 적도 있다. 내가 아이를 좀 더 포근하고 부드럽게, 온화하게 받아주고 교정해줘야 하는데 너무 감정을 표출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했다. 가끔 쳐다보면 아빠 보지마! 할 때는 생각은 이미 아이가 다 커서 방문 닫고 들어가서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엄마가 많이 아파 한 달 넘게 아이와 떨어져 있으면서 내가 나름 유대감을 쌓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싶고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계속 다 해야지 싶어서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했다. 우선 안녕놀이. 여러 인형들 마다 특유의 목소리와 톤을 정해두고 아이와 상황극을 하는 것이다.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한 동안 밤에 잠잘 때는 무조건 아빠여야 했다. 그다음은 밤 목욕. 매일은 아니지만 샴푸로 비눗방울을 만들어서 후 불어주는 놀이로 아이의 환심을 샀다. 마지막은 안아주기.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상대적으로 튼튼한 팔로 안정감 있게 안아주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보다 높이 안아줄 수 있으니 아이가 좋아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쇼핑몰에서 한참 놀다가 집에 오는 차에서 잠든 아이. 카시트에서 번쩍 들어 집까지 아이를 안고 가는데 아이가 잠결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품이, 좋아.


이 감동을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저 작은 아이에게서 나온 말 한마디가 그 순간 그 어떤 행복보다도 더 큰 행복을 주었다. 다혈질에 성격도 거칠고 예민하고 실수투성이의 아빠지만, 그런 아빠를 향해 저렇게 따뜻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에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언제 사춘기가 오고 언제 우리 사이가 멀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감정을 잊지 말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아빠가 되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수만 번 되뇌었다


아이는 요즘 놀이터 놀이에 푹 빠졌다. 한 동안 미끄럼틀에 사족을 못 쓰더니 요즘은 그네 타기에 열중이다. 제법 강하게 등을 밀어주는데도 더 빨리! 더 빨리! 외치면서 나를 자극한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내뱉은 말에 또 한 번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빠! 재밌어! 그네! 재밌어! 아이가 느끼는 행복감을 더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이 등을 밀면서 행복의 표현을 하나씩 외쳤다. 재밌다! 그러자 신난 아이가 중얼중얼 따라 한다. 재밌다! 재미따! 즐겁다! 즐거따! 신난다! 시난다! 기분 좋다! 기부 조타! 행복하다! 햄보하다! 그렇게 아빠와 딸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그네는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24년 아주 춥고 시렸던 겨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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