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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Oct 19. 2022

돌아온 방송국 놈

3여 년을 착실하게 쉬고, 지난 5월 나는 방송에 복귀했다.

방송을 왜 쉬었냐고 물으신다면...

매해, 그러니까 1년에 한 권씩 책을 출간하기도 했고, 드라마 각색도 조금 하고(사실 다 핑계고).

그냥 염증이 났다. 방송이, 그리고 방송작가로서의 삶이.

늘 쫓기듯 살아야 하는 방송판에서, 시청률에서, 여유 한 줌 없는 치열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번에 언니가 프로그램 하나 론칭하는데 너 들어 올래?"

"작가가 갑자기 그만뒀어. 한 텀만 네가 좀 땜빵해주라."

"선배가 말이야, 진짜 딱 네가 필요한 시점이거든? 지금 스케줄 많이 안 바쁘면 좀 도와줘."


나를 찾는 모든 곳에, "죄송해요. 제가 지금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내년 책 때문에..." 아주 착실하고 공손하게 이 모든 제의를 거절해왔다. 무지개 반사를 연신 외치며 내 시간을 만끽하는 나날들이 계속 이어지고.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들도 따분하고 무료해질 무렵이었다.

 

5월의 봄바람에 이끌려 베란다로 나가보니 작은 나무에 옅은 초록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무료하고 심심한 시간이면, 평소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유독 관심이 생긴다. 그날도 '고놈 참 신기하다'며 한참 눈 요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진동이 요란히 울려댔다. 발신자는 10년지기 피디였다.


"요즘 뭐해, 바빠?"

"아니, 딱히? 왜."

"그게..."


뜸들이는 그에게 대뜸 물었다.


"일하자고?"

"눈치 한 번 빠르네."


아, 하면 척이지. 방송 짬밥이 얼만데, 그정도 눈치도 없을까.


"그래서, 뭔데?"

"퀴즈배틀쇼야. 할래?"

"그래~. 하자."

"에? 진짜? 이렇게 바로? 페이도 안 물어봐? 너 진짜 후회 안 하지!?"

"어. 안 해."


10년 넘게 알아온 피디와 일터에서의 만남. 왠지 모르게 설레고 심장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다시 뜨거운 방송 현장에서 일할 걸 생각하니 설렜다는 말이지, 피디 때문에 설렜다는 게 아니니까.) 여튼, 생각지도 않게 예능버라이어티로 복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세트를 짓고, mc와 각 회차의 출연자를 섭외하고, 퀴즈 출제에, 스튜디오 대본까지. 이 방송판이라는 데는 정말이지 3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여전했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더 열악하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지치고 힘들고, 미쳐 죽을 것 같은 환장 스테이지가 연일 벌어지는데도 웃음이 났다. 즐겁고 신나고 재미가 있었다.

매일 나를 갈아 넣고 있는 데도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 요즘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에 완전 생기도네~. 로또라도 맞았냐?"


주변에서는 이런 말들이 들려올 정도였으니까. 같은 사무실을 쓰는 다른 팀에서 묻기도 했다. 그 팀은 뭐가 그렇게 맨날 재미지고 웃을 일이 많냐고. 이런 물음들 끝에 문득 생각이 난 건 그랬다.

방송이 꽤 그리웠구나.

그렇게  피는 에서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까지, 나는 정말 하얗게 불태웠다. (실제로  방송을 준비하며    만에 4KG 빠졌다.)

그리고 오늘, 살을 깎고 고군분투한 그 결과물을 TV 화면을 통해 확인했다. 볼 땐 이렇게 후루룩인데 도대체 저걸 만든다고 몇 달이나 생고생을 했구나 싶으면서도, 방송 끝물에 지나가는 스텝스크롤 작가 이름 첫 줄에 찍힌 내 이름을 확인할 때는 조용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맛이지. 이 맛에 방송하는 거지."

 

이렇게 나는, 방송국 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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