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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an 22. 2024

#1. 나 아파.. 아니, 죽을 것 같아

-지호의 이야기 1

"싸아아-- 자-앙"


이미 얼큰하게 취기 섞인 목소리. 이영은 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주방에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하는 대꾸가 그러했으므로.


"차였니, 찼니"

"찼지! 당연히!!"


"잘했네" 이영은 무감한 눈을 들어 지호 쪽으로 슬쩍 몸을 틀며 담백하게 갈무리했다. 흐...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이는 지호가 두어 걸음쯤 살짝 비틀대더니 주방 앞 바 스툴에 걸터앉았다.

휴우. 지호에게 들리지 않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칼질을 시작하는 이영. 툭툭툭, 탁닥탁닥탁탁탁. 술 기운 때문에 흐릿해진 지호의 초점에 뿌얬다가 다시 환해졌다가, 이영의 모습이 마치 춤을 추듯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뭐 대단한 재료를 손질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채소를 써는 것일 뿐인데. 군더더기 없이 칼질을 하는 이영의 모습이 단아하다 못해 기품까지 묻어나 보이니 말이다.

이영이 무오리로 들어온지도 어느덧 10년. 하루가 빠르게 변하는 시간동안 올곧게 이 공간만이 변하지 않는 듯했다. 낡은 카세트, 그리고 음질 낮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목소리까지. 취기로 젖은 눈을 들어 가게 안을 휘이 둘러보던 지호가 말했다.


"첫차, 였던가? 왜 맨날 이 노래야?"


칼질하던 이영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 천천히 다시 칼질을 하며,


"여기랑 어울리잖아, 감성이 딱."

"감성은 개뿔. 촌스러워."


피식. 이영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낮게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지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드는 그때, 지잉-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며 화면이 밝아졌다. 자신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호가 물었다.


"싸장은 핸드폰 안 만들어?"

"어"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다는 듯 이영이 경쾌하게 답을 내놓았다.


"요즘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딨니?"

"있어서 뭐하게. 쓸 일도 없고."


지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핸드폰도 없는, -그렇다고 첫차에 TV나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원시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벌써 10년인가."


칼질을 멈추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는 듯 이영이 말했다.


"뭘 새삼스레."

"아직도 이해가 안 가서. 이 촌구석,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들어왔니."


쥐고 있던 칼을 툭 내려놓은 이영이 주방 옆에 있는 작은 창을 가리켰다.


"저 앞 산 안 가봤지?"


이영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지호.


"온통 시커먼 칠흑이구만! 저기에 뭐가 있긴 한 거야?"

"저기 가면 철마다 산나물이 있어. 어쩌다 운 좋으면 시중에 없는 버섯이나 나무 열매를 만날 때도 있고."


지금 무슨 소릴... 취기가 한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지호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이영이 말했다.


"뜯어먹을 게- 그런 거라 좋아, 이 동네는."


픽- 실소 비슷한 것이 비어져나왔다.

농담 같은 질문에 철학 같은 대답을 내놓는 여자. 이럴 때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여자의 정체가 더 궁금해지지만, 한 번도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단 말이지. 그래서일까. 이 정체 모를 여자에게 속을 터놓고 마음을 꺼내놓는 일이 가끔은 위로가 된다. 요상한 철학도 꽤나 마음에 들고.


"나 아파."

"숙취로 인한 두통이면 카세트 밑 협탁, 두 번째 서랍에 두통약 있고. 마음이 아픈 건 시간이 약이고."

"아씨... 나 진짜 아프다고! 아니, 죽을 거 같다고...!"


지호의 외마디 외침에 이영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완전히 틀어 마주했다. 잠시 무감한 눈으로 지호를 바라보던 이영이 주방에서 나와 지호의 옆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지호의 이마를 짚으며,


"열은 없어."


이마에서 손을 떼 지호의 손바닥을 요리조리 살피다 손목의 맥을 가만히 짚는 이영. "맥도 정상이고." 그때 이영에게 손을 빼내는 지호.


"뭐하는 거야."

"안 죽을 거 같다고, 서지호 씨."

"나 진짜 딱- 죽을 거 같은데?"


말간 눈으로 지호를 보던 이영이 스툴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안에서 쉬익- 쉭쉭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지호의 앞에 따듯한 우유 한 잔이 놓였다.


"사람은 말이야."


이영이 자신의 심장께를 살며시 가리켰다.


"여기가 미친듯이 아파서 진짜 죽을 거 같을 때, 몸이 먼저 막 아파. 맥도 정상이 아니고, 열도 나고. 진짜 이러다 딱-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아파."

"열도 없고 맥도 정상인 나는 꾀병이다, 뭐 이런 거야?"

"아니. 죽을 정도로 아픈 날은 지났다는 거야. 근데 몸이 기억하는 거지, 그날을. 힘들고 괴롭고 아팠던 그때를. 시간이 이만큼 지났어도‥. 참 이상하지? 그 시절만 되면 이상하게 막 아픈 거 같거든."

따듯하게 눈을 맞춰오는 이영의 눈을 마주한 순간, 지호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새끼가! 버릴 게 딱 지 좋아하는 마음,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거마저 버리 게 한 그 나쁜 개자식이! 다시 시작하재..."


지호가 속엣 것을 토해내듯 끅끅 울어댔다. 말없이 옆에 놓인 티슈를 뽑아 지호에게 건네는 이영. 받아든 티슈로 코를 팽 푼 지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기 시작했는데! 그깟 놈 하나 못 잊고 병신같이 심장만 쥐어 뜯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몇 년을 이렇게 헤맸는데. 왜 이제 나타나서, 왜! 왜!! 왜에!!!!!"


엉엉- 서러운 듯 무언가를 쏟아놓는 듯 또 다시 울음을 뱉어놓는 지호의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이영은 얼마간 그 모습을 바라봐주었다. 그러다 울음이 잠잠해질 때쯤.


"그 사람 탓, 하고 싶은 거야?"


이영의 물음에 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두 손으로 꾸욱 누르며 지호가 말했다.


"그땐 버릴 게, 같지도 않은 사랑 딱 그거 하나여서 버려야 살 거 같았거든? 나한테 주어진 선택지라는 게 버리는 거 말곤 없어서. 근데... 싸장, 나 왜 내가 더 아프고 내가 더 미칠 거 같아? 상황만 보면 내 인생에서 세상 이거보다 잘한 일이 없는데. 도대체 왜 아직도 이렇게 펄럭이는 마음이냐고..."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이영이 차가운 얼음물을 내놓을 때였다. 촤르릉- 드림캐쳐의 맑은 울림이 첫차 안을 휘감았다. 그리고 낮게 부딪혀오는 목소리.


"지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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