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운명이라면 좋겠어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6

by 장해주

“희락이는 이상형이 뭐야? 엄마 이상형.”


차희의 따뜻한 음성에 아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차희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이 꼬물거렸다.


“저는요...”


아이가 말끝을 늘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도 슬쩍 긴장한 듯 표정이 굳었다. 희락이가 생각하는 엄마. 아빠인 자신조차 한 번도 딸 아이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지금껏 엄마라는 존재가 비워놓은 그 자리를 채우기에만 급급했지 정작 아이가 무얼 원하는지는 몰랐던 거다.


“매일 희락이랑 같이 있어 주는 엄마요. 어디 가지 않고, 맨날맨날 저랑 같이 있는 엄마.”


아이를 바라보는 차희의 눈빛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차희는 희락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그거면 돼? 맛있는 것도 못 만들고, 청소도 못하고, 희락이 머리도 예쁘게 못 빗겨주고. 그런 거 하나도 못 해도 상관없어?”


마치 제 앞의 남자에게도 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차희는 일종의 고백의 언어를 이야기했다.

아이는 여자의 말뜻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 살짝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 이내 결론이 났는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거는 우리 아빠가 잘하니깐 괜찮아요!! (강을 보며) 그치 아빠? 아빠가 다 잘하니깐 괜찮지요오~?”


희락의 모습에 큭큭큭 차희가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 눈앞에 있는 아이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사실 차희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를 봐도 크게 예쁘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는, 그저 아이였다. 그런데 희락이는 달랐다. 제 손을 감아쥐는 작은 손도, 곰살맞게 하는 말들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으니까.


“희락이 엄마 될 사람은 진짜 행복하겠다~ 요렇게 예쁜 딸이랑 뭐든 다 잘하는 남편이랑 같이 사니까.”


차희의 말을 듣던 희락이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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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지켜보던 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펼쳐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릿속에 온통 어지러웠다. 그보다.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겠지. 오늘 처음 만난 제 딸과 꽃을 사러 오는 여자. 둘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흡사 엄마와 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니까. 어쩌면 아빠인 자신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주방 쪽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던 이영이 조용히 강의 뒤쪽에 섰다.


“참, 잘 어울리네요. 저 두 사람.”


마치 제 속을 읽은 것 같은 말소리에 강이 천천히 이영을 돌아봤다.


“운명, 같은 게 정말 있을까요?”


운명이라. 이영이 가만히 읊조렸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차희와 희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요. 운명, 뭐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운명도, 결국 선택이 아닐까요. 그 선택에 대한 것은 또 만들어가기 나름이겠죠. 인생의 끝이란 언제나 정해진 결말도, 결과도 없으니까요.”


이영의 말에 강의 시선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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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아 이제 집에 가자.”


조용한 음성이 희락과 차희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똑같은 시선이 강에게 되돌아왔다.


“이모! 우리 또 언제 만날 수 있어요?”


또랑또랑한 얼굴로 답을 기대하는 희락. 차희가 아이의 한쪽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든.”


“진짜요?? 그러엄~ 내일도 만날래요, 우리?”


“우,리..?”


‘우리’란 말이 이렇게 다정한 말이었나. 차희가 잠깐 단어를 곱씹는 때였다. 불쑥, 희락이 새끼손가락을 차희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약속해요!”


차희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래 약속!”


아이의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거는 차희. “그리구 도자앙~” 엄지손가락을 부딪치며 도장까지 알뜰하게 확인받는 아이.


“내일도 만나는 거예요! 꼭! 꼬옥!!”


“그래. 꼭.”


차희는 다시 한번 희락과의 약속을 다짐했다. 그리고 뒤에서 은근히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희락.”


강이 다시 한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 아빠의 목소리에 쪼르르 달려가는 희락.


“응! 가! 가요오!!”


발은 제 아빠 쪽으로 향하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차희에게 향했다. 그리고 첫차를 나서기 전, 아이는 다시 한번 차희를 돌아보며 외쳤다.


“이모오! 내일이에요!! 꼭이에요!”


기대에 찬 아이의 얼굴을 보는 차희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응. 내일, 꼭.”


아이를 향해 차희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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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희락이 도대체 누구의 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강이 물었다.


“딸. 근데 이모가 왜 좋은데? 오늘 처음 봤잖아.”


희락이 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도 차암~ 그런 거 몰라? 찌릿찌릿 이런 거”


희락이 몸을 움찔움찔 움직이며 ‘찌릿찌릿’을 흉내냈다.


“찌릿찌릿?”


“통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막 그런 거~”


언제 커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딸 아이의 또랑또랑한 대답에 강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강은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적였다. 조금 전 차희에게서 받은 명함이었다. 윤차희. 강은 속으로 차희의 이름을 되뇌며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운명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 선택이, 윤차희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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