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덕후 DNA가 있다. 무언가에 푹 빠지면 끝장을 보는 타입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못 말리는 덕후여서 좋아하는 아이돌의 공연을 보기 위해 땡땡이친 적도 있으니 말 다했다. 물론 학교 땡땡이친 것이 옳은 행동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덕후 기질을 자랑으로 삼는다. 나이가 들면서 때때로 삶이 무료해진다는 것을 느끼지만 언제라도 불을 지펴서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 믿음의 근거는 덕후 기질이다.
내 아이도 이왕이면 덕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것에 디깅할 때의 행복함, 그걸 아니까.
그런데 단순히 덕질이 주는 행복감만으로 그것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덕질과 창의력
확산적 사고는 아이가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분야에 몰두하여야 빛을 발한다. 따라서 아이가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어떤 분야의 덕후가 되어 뇌가 변해야 가능한 것이다.
<하루 15분 그림책 읽어주기의 기적>, 김영훈
확산적 사고란 고정된 틀을 깨는 사고, 논리적 질서의 궤도를 벗어나는 사고를 말하는데 이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며, 의외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소아신경학 전문의인 저자는 어딘가에 몰두하는 뇌가 창의성을 키운다고 말했다.
둘째, 덕후와 집단지성
부모들은 지금부터라도 '내 아이는 뭘 좋아하지? 뭘 잘하지?'를 파악하고 개성과 창의성을 키워줘야 한다. 그래서 어느 분야의 덕후와 고수가 되면,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여야 한다.
<하루 15분 그림책 읽어주기의 기적>, 김영훈
미래 인류는 다양한 구성원이 협동하고 집단지성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전망하는 저자는 아이들이 협력하고 공감할 줄 아는 인성을 기본으로 갖추고 어느 분야의 덕후, 고수로 자라나는 것의 장점을 강조했다.
셋째, 덕질과 스토리
덕질을 하는 덕후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스토리가 생긴다. 그런 스토리들은 대화거리가 되고 글감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로 나를 소개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된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 하는 것은 내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캐릭터를 생성하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떠올릴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스키 좋아하던 애', '장기하와 얼굴들 덕후'로 기억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시간에서 나를 알던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타인의 기억 속에서 생생한 캐릭터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과거에는 덕후라고 하면 연예인이나 게임, 만화에 빠져서 현실감 없고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한심한 이미지로 인식되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운동, 여행, 영화, 공연, 음악, 술, 커피 등 모든 취미 생활은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보다 그 대상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그 분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좋아하기에 삶이 퍽퍽할 때도 있다. 덕질이라는 것은 종목에 따라서 경제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것도 있고 체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다. 무엇보다 심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긴 뒤로는 체력, 시간, 심적 여유 그 모든 것이 열악해졌다. 수입이 생기는 즉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금이 되어버리니 경제적 상황도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지금 이걸 좋아한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이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한다면’하고 생산성과 기회비용을 따지기도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좋아하는 것이 생겼을 때, 그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막상 그 앞에서 여유가 없어 지지해주지 못할까 봐 마음 한 켠이 무겁기도 하다.
“좋아하는 걸 좋아해”
최근 스타벅스의 캠페인 슬로건이다.
내 아이, 나 자신, 그리고 남편,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용기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