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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백 Feb 17. 2022

1. 가장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내가 되기 싫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내 주위의 존재들이,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진다는 커다랗고도 불변하는 사실은 태어나 첫 숨을 들이쉴 때부터 우리의 가치판단 기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불영원성에 대한 공포는 살아가는 내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행위와 맹목적 믿음을 낳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실존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겨울은 가혹한 계절이다. 근래 몇 달간 내 주위의 것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내겐 2살 된 반려묘가 있다. 이름은 생강. 동생과 함께 고심 끝에 입양하여 2인 1묘 가구로 살고 있었는데 최근에 동생이 독립하게 되면서 생강이를 데려가기로 결정이 났다. 부지런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건만 동생의 낯선 새집에 생강이를 데려다 놓고 돌아온 익숙한 아파트는, 빠져나간 2인분 만큼의 공간보다 더 휑했다.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처럼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혼자 지내게 된 경험은 있어도 같이 있던 공간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떠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조금은 좁고 복닥거리기까지 했던 ‘우리’ 집이 아닌 ‘내’ 집에 혼자 남겨진 감각이 허했다.


또 얼마 전에는 매우 아끼는 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나와의 인연을 끊었다. 말도 잘 통할뿐더러, 나를 완전에 가깝게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받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나이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해 셋이서 막역하게 지냈던 그룹 중 한 명이었다.


친구는 돌연 단체 메신저 방을 나가더니 곧 프로필 사진도 없앴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는데 알고 보니 사진이 없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못 보는 거였다. 우리를 차단하는 걸로 모자라 ‘내 프로필 공개하지 않기’ 기능까지 걸어놓았던 거다.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그 친구의 프로필에 더 이상 송금 버튼이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상대방을 차단 후 프로필 공개하지 않음 설정을 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송금할 수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손절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나와 내 친구는 돌아가면서 그 애의 꿈을 꿨다. 부정당한 우리의 세월은 내 무의식 속에 간직한다 치더라도, 차단 버튼 하나로 내가 그 애에게 주었던 마음은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당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단절. 이만큼 황당하고 답답한 것이 또 있을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가차 없이 적용된다. 부재는 존재의 증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 대상을 잃고 나면 어느 때 보다도 그 존재에 대해 가혹하고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혼자 남은 느낌은 황당하고 지저분하다. 훤히 내보여준 내 마음을 가지고 도망친 존재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넌 아직도 그러고 있냐? 좋을 때 끝난 지가 언젠데.’ 얼른 눈치를 채서 떠나지 못하고 어물쩍 남아있던 나만 바보가 되었다.


또 바보가 되고 말았다. 이번이 몇 번째야. 이젠 정말 속지 않기로 했잖아.


오래전부터 바보가 되기 싫었던 나는 일명 '바보 대신 차가운 사람 되기'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꼭 마지막이 되는 것을 피한다. 통화할 때는 내가 먼저 끊고, 집에 가는 길에 손을 흔들고 뒤돌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야깃거리가 끊겨가는 단체 메신저 방에서는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늦은 밤 식당에서도 손님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좀 더 빨리 자리를 정리한다.

그래서 파티가 끝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의 공기라던가, 학생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정 같은 것들은 잔인하게 느껴진다. 즐거웠던 순간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그런 열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모두 흩어져 버린 장면들.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마음을 껴안고 방황하는 것이 싫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기 싫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친구에게 이유 모를 단절을 겪었을 때, 누군가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을 때 '역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나 자신을 철저히 혼자로 만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늘 내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넓은 세계로 인도해준 건 타인이었다. 나 혼자 만든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순간들은 사라졌을지라도 성장한 나는 여기 남아있다. 그 성장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신비한 일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차가운 사람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새로운 인연을 찾아 기웃거린다.





*해당 글은 <잡지 비평> 2021년 3월호에 실린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하여'를 수정 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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