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여름이다. 여름은 내게 특별한 계절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사랑하는, 또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사람들이 태어난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은 내 것은 아니지만 애틋하다. 만물이 울고, 영글대로 영글어버린 아름다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온 세상에 떨치고, 절정을 외치는 계절에 세상에 나와서인지 그들은 모든 마음을 불태우듯 내게 꺼내 보여주었다. 절정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라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온몸을 내던져 나를 사랑해 주었다. 여름에 태어난 그 여자들은 내게 끝나지 않는 여름을 남겼다.
1.혼자는 확실한 온전함을 보장하지
새삼스럽지만 나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모든 만남은 헤어짐을 동반하지 않는가? 태초부터 모든 존재는 유한했으며 모든 만남에 헤어짐이 필연적으로 찾아오리란 것은 이 글을 쓰는 나도, 읽고 있는 당신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을 부정해봤자 소용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당신을 떠난다. 그 관계를 끊는 것이 당신의 손이든 그의 손이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숙명이든. 헤어짐은 예고 없이 불쑥 문을 두드리기도, 대강의 러닝타임이 예상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슬금슬금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하나의 존재는 없는 것인가? 나와 동시에 생성되고 동시에 그 수명을 다할 유일한 존재.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는 나 자신과 자의로 해석하고 재단한 타인들이 존재한다. 그 세계 안에서 나는 왕이며 그 어떤 것도 나를 해하지 않는다. 혼자만이 확실한 온전함을 보장한다.
2.영원을 갈구하는 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에는 ‘영원이라는 지붕 없는 장소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름답기까지 할 수는 있으나 예술가는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참 좋아하는 구절인데, 이 대목을 읽고 나는 그간 왜 내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알면서도 고통받았는지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영원을 믿지 않으면서도 영원이라는 장소를 너무나도 갈구했던 것이다. 그 괴리를 인지한 사람에게 남는 것은 결국 고통뿐이다.
아마 이 세상에 안정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아무리 혼자를 좋아하고 정착을 구속으로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단 하나의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누군가 이리저리 부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안정과 애정을 원한다는 것의 반증이다.
꾸며낸 이야기이든 진짜이든 세상을 살아가며 ‘happily ever after’의 레퍼런스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를 채널별, 연령별로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최근 내 눈에 자꾸 띄는 것은 여남 커플의 사례가 아니다 (여남 커플 이야기라면 이제 지겹다). 유튜브나 SNS로 오래된 레즈비언 커플이나, 친구끼리 몇 년째 함께 생활을 꾸려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어 단 하나의 존재로 자리 잡은 사람들. 이렇게 오래오래 함께 하는 동반자들을 보면 신기함과 부러움이 동시에 들곤 한다. ‘늘 누군가 내 옆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건 대체 어떤 감정일까?’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상상해볼 수조차 없다. 마치 ‘내가 개구리였다면 어떤 감정일까?’와 같은 정도의 터무니없는 질문이라고나 할까.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갖고 싶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이렇듯 나는 내가 절박하게 갈구하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지 않아도 숨 쉬듯 존재하는 안정감을 원한다.
나는 그간 나와 깊은 관계를 맺는 이들이 늘 무한한 내 편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물론 그런 일이 세상에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은 형태와 무게로 와서 맞닥뜨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란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우리의 관계에 집착적인 수준의 믿음과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3.진흙에서 뒹굴어도 좋으니 네 세계를 보여줘
그럼에도 나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들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존재하고, 아마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간헐적이지만. 유독 여름에 태어난 여자들은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과 뜨거움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고, 이 사람이라면 내 세계를 조금은 허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했다.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냉소로 일관하던 내가 사실은 사랑을 누구보다 믿고 싶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여자들.
혼자가 온전한 형태라고 믿으면서도 불확실한 미래를 선사하는 타인과 손잡는 것을 ‘앞으로’ 나아간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역시나 나는 많은 걸 알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내가 모르던 나와 마주치기도 하고 완벽하다고 믿었던 내 세계가 무너지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확장되었다. 무한히. 1 더하기 1의 답이 2가 아니라 3도 되었다가, 몇백도 되었다가 어느 날은 무한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타인의 세계와 뒤섞이는 경험은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왕인 세계보다는 진흙에서 뒹굴어도 다른 여자들의 세계를 구경하고 싶다. 확실하진 않지만 더 나은 온전함을 선사하는, 내 미래에 개입한 불확실성이란 폭탄인 이 여자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선사해준 이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내 곁에 있는 지금 이 사람이 나의 영원이 될지.
나는 여전히 영원이라는 지붕 없는 장소를 갈망하기를 그만두지 못하겠다.
*해당 글은 <잡지 비평> 2021년 7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 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