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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14. 2019

산티아고 일지 24 고요한 역동성

¿Dónde estoy en este mapa?

30/04/sábado

4월 30일 토요일

desde San Martín del Camino hasta Astorga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서 아스토르가까지

여행한 지 27일, 걸은 지 24일



   지수와 은배, 박 씨 아저씨와 나는 준비를 마치고 벌써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제의  숙소는 일정 시각이 되기 전엔 문을 열지 않았다.)


- 끝까지 좋은 여행 하길 바라요.


마침내 오스피탈레로가 바지런히 준비를 마친 순례자를 한 명씩 배웅했다. 해도 달도 모두 떠있는 새벽, 우리는 긴 수풀을 헤치며 길을 나섰다.


   도로 옆에 난 좁은 길에 흙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냐만은 그 얕은 흙바닥에 구멍들이 줄곧 보였다. 손으로는 더 이상 파낼 수 없는 딱딱하고 창백한 흙바닥에 작은 봉우리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개미들의 아파트 단지이자 일개미들의 성과물을 밟지 않으려고 신경을 기울였다.

   그림자가 짙어지고 공기가 뜨거워지는 때가 되어선 다리 하나를 건넜다. 다리 밑 강줄기는 마을을 갈라 흐르고 있었다. 물에 뜬 그림자와 전깃줄에 나란히 들어앉은 새들. 그들이 줄지어 날개를 퍼덕여도 마을의 고요함은 깨지지 않았고, 나는 그런 정적 속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 조금 돌아 가도, 긴 거리를 걸어야 해도 마을을 지나는 편이 좋아.


그래서 나는 갈림길에서 악의 없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그들과 인사하는 것을 선택했다. 다행히 그 선택은 나에게 적절했다. 산뜻한 환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 두렁 위에 살짝 발을 댄 두루미가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순간 주위의 공기를 끌어 모으는 듯하더니 활공을 시작했다. 둥지를 틀고 앉은 두루미는 많이 봐왔지만 그들의 비행을 시작부터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메라 화면을 확대하여 반드러운 선을 크게 보았다. 날갯짓에 거리낌이 없었다.

   두루미를 보내고 나는 다시 땅 위에 붙은 발에 집중했다. 덜덜 대는 트랙터를 따라 걷다 보니 넓은 밭을 지나 금세 농가의 끝이었다. 가늘게 뻗은 나무들이 정갈하게 서있는 곳, 그 사이로 보이는 빛이 밝고도 밝구나! 그래서 나는 호기롭게 태양을 바라보았다. 버거운 일이었다. 햇빛에 스치는 그때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 부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걸었다. 잔상이 남으니 마치 몽롱한 느낌이었다. 내 다리 곁으로 검은 빛깔의 갈기가 매력적인 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리곤 슬쩍 한쪽으로 치우쳐 걷게 유도하더니, 위이이잉. 아이 주모 데 나랑하. (Hay zumo de naranja.) 오렌지가 빛깔 좋은 음료로 갈려져 나오고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면 모래 바람이 시야를 온통 가렸다. 돌을 나르는 공사장 차들과 이를 피해 쌩쌩 달리는 지프차들이 길을 막아섰다. 사막은 또 처음이네! 나는 코를 막고 눈 밑을 끌어올려 실눈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큰 진흙 구덩이 하나를 지난 후엔, 짙게 메마른 풀 한 포기를 시작으로 서서히 활기 띈 풀밭이 보였다. 얼마 안 가선 음악 소리와 나뒹구는 예쁜 돌. 누가 뒹구는 돌에 그림을 이리도 예쁘게 그려놨나 했는데 메뉴가 또박또박 적혀있는 것이 영락없는 식당 간판이었다. 갖가지 천으로 건물 벽에 해먹을 쳐서 만든 간이식당엔 몇몇 사람이 누워서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엄마야!


이게 밟으면 독이 나와서 조심하라던 그 벌레인가? 나는 벌레를 피해 먼 곳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리는 곳, 드레스 모양으로 묶인 짚을 보며 혼자서 환상의 무도회를 꿈꿨다.


   아무래도 뜨거운 볕에 정신이 빠져나가는가 봐. 특별히 몸에 힘을 주지 않고, 특별히 머리에 생각을 담지 않고, 그냥, 그냥 걷는 거였다. 터덜터덜. 그런데 그 무렵이었나? 하늘에서 그림자가 내렸다. 그리고 내 주위를 뛰어다녔다. 올려다보니 “독수리”였다. 독수리의 그림자가 내 주위를 쏜살같이 뛰어다녔다.


- 독수리라니!


신기함의 가면을 쓴 무서움이 불현듯 고개를 쑥 내밀었다. 너무 수척해진 탓에 독수리가 나를 먹이로 보는 건 아닌가 우스운 걱정을 진심으로 해보았다. 잘 안 보이나 본데, 내가 삐쩍 곯았어도 살아있다고!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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