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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22. 2019

산티아고 일지 30 길치

¿Dónde estoy en este mapa?

06/05/viernes

5월 6일 금요일

desde Triacastela hasta Sarria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사리아까지

여행한 지 33일, 걸은 지 30일



   산실. 조개 모양 장식이 큼지막하게 달린 수도에서 물이 나오는 곳. 물이 모이는 가운데를 기준 삼아 둘러앉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배의 중국인 친구 엘레나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수와 은배는 그녀를 보고는 기회를 포착한 듯, 일심동체로 움직였다. 엘레나에게 인사도 할 겸 잠깐 쉬었다 가자! 그들은 배낭을 내리고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줄곧 뒤처졌던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


- 천천히 가고 있을게요.


어제도 헨리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같은 숙소였는데……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둘 다 지금껏 무사히 걸어왔다는 것. 또 하나는 뜨문뜨문이나마 친구들이 연락을 준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잡생각들로 혼자 언덕을 오르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엘레나가 나를 앞서 걷고 있었다. 쉬고 있지 않았나? 걷다 보면 유럽인들의 스퍼트, 다시 말해 막판 힘내기가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전력을 다할 땐 굳이 따라잡지 않는다. (물론, 누가 됐든 따라잡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엘레나의 속도는 그들의 것과 비견할 만했다.


   바르의 간판이 보였다. 순례길과 떨어져 있어서 그곳을 가려면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이후에 바르가 있을지 마트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고 다들 바르로 향했다. 우리도 바르에 가기로 했다.


- 거기 케이크가 정말 맛있단다.


먼저 바르를 들렀다 나갈 채비를 하던 노부부는 맛집이라며 호평을 남겼다. 나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며 노부부가 말한 케이크가 무엇일까 유추했다. 젤리와 견과류가 뿌려진 초콜릿 케이크는 아닐까? 거기에 핫초코를 곁들인다면, 환상일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여태껏 시켰던 핫초코 중에 가장 마시기에 적절한,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스틱형 파우더를 우유와 주는 것도 아니고, 초콜릿을 통째로 녹여 꾸덕한 상태로 주는 것도 아닌, 정확히 ‘음료’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장 그것을 시켜 따뜻하게 한 모금 머금었다. 그렇게 맛을 음미하는데 눈 앞에 ‘살리다(Salida, 출구)’, 벽에서부터 바닥까지 늘어진 판초, 그 판초에서 흐르는 물기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려 꾸역꾸역 마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배낭들이 보였다. 찰칵. 좋은 사진일 것 같은데? 지수가 말했다.


- 아 참! 다들 크레덴시알 앞에 적으셨어요?


나는 새 크레덴시알 앞을 무어라 채워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사람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 여긴 이름 적는 란이고. 여기가 출발지!


그러면 중간에서 누군가는 영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 거긴 출발한 날짜 아냐?


그들은 자신의 여권을 꺼내어 뚫어져라 연구했다.


- 아니죠. 여긴 출발한 마을 이름을 쓰는 거예요. 아, 나가서 왼쪽으로 가야 순례길로 돌아갈 수 있어요!


주인 여자는 떠나는 순례자들의 우비를 챙기며 대답했다.



- 케이크 정말 맛있었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왼쪽 맞죠?


주인 여자는 기특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선, 은배, 나는 다행히 순례길로 바로 들어섰다.


-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사람이란 존재는 어디서든 정말 튀는 것 같다. 색색깔의 우비를 입은 무리가 우리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반대편(산티아고 방향)에서 오는 남자 두 명도 있었다. 어디서 왔어? 오, 한국! 그럼 한국어로 ‘헬로’, ‘땡큐’가 뭐야? 안녀옹? 맞나? 땡큐는 고맘, 아, 고맙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약간 얻은 그들은 우리가 지나온 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빗방울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은배는 오전에 가방을 포터로 보낸 상태였고, 지수와 나는 배낭을 메고 걷는 중이었다. 은배는 먼저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는 배낭에 걸려 내려오지 않는 판초를 다잡아 주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마을 초입보다는 중간 이후에 알베르게를 잡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알베르게는 건물 언저리에서 오리들이 산책 중인 그런 곳이었다. 은배와 나는 물구덩이에서 뒤뚱대는 오리들을 바라보며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주었다.


   다리 건너 슈퍼를 찾아 나서는 길. 그 김에 약국도 갈까 하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약국인가 싶어 달려가면 동물병원 혹은 벌써 문 닫은 곳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슈퍼만 들르려는데 슈퍼에서 한 아줌마가 절뚝이는 내 다리를 보더니 약국에 가서 "꼭" 안티-인플라마토리(Anti-inflammatory 소염제)를 사라고 했다.


- 여기에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휴대폰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휴대폰을 대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약국은 나 혼자 찾아갔다. 그때, 언젠가 한 번은 보았을 익숙한 외모의 외국인이 여기서 가장 가까운 알베르게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내가 묵는 숙소가 가장 가까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길치인 데다가, 온 길을 외우기보다는 순간순간 느낌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밤낮이 바뀌면 길을 찾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다리를 한 개인가, 두 개 지나온 것 같고, 동물병원이 그 근처에 있어요. 나는 그에게 성실히 엉터리 소개를 해주었다. 그가 멋쩍게 알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나는 약국을 잘 찾아갔고, 안티-인플라마토리를 살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보니 아까 길을 묻던 순례자가 알베르게에 와있었다.


- 제대로 찾아왔네요!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침대 1층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은배가 양보한 덕이었는데, 내가 약국에서 돌아왔을 때 1층 자리는, 다시 은배의 자리가 되어있었다. 휴대폰이며 책자며 펴 들고 앉아 다른 이들과 대화를 오래도록 이어나갔다. 해서 난 꽤나 오랫동안 로비에 나와 오리들과 놀았던 것 같다. 꽥꽥.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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