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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29. 2019

산티아고 일지 32 흐름

¿Dónde estoy en este mapa?

08/05/domingo

5월 8일 일요일

desde Portomarín hasta Palas de Rei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

여행한 지 35일, 걸은 지 32일



   요즘 배가 살살 아픈 게 화장실을 자주 들르는 것 같다. 남들은 여행을 하면 물갈이도 하고 음식이 안 맞아 잘 먹지도 못한다는데 나는 그런 것 없이 두둑이 잘 먹어와 놓고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무른 것이 움틀대는 느낌의 배를 움켜쥐고 덜 마른빨래를 집어 들었다. 찝찝하다…… 벌써 7시를 넘긴 시각, 다음 마을에서 먹으려던 아침을 알베르게에서 챙겨 먹기로 했다. 어기적거리는 나 대신 음식은 은배가 주문했다. 구운 식빵 두 쪽. 오스피탈레로가 직접 토스트를 구웠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서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물었다. 배가 아파도 고픈 건 고픈 것. 나는 토스트를 추가해서 먹었고, 화장실을 한 번 더 들른 후에 길을 나섰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지금이 어디쯤일까 하고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한데 이상하게도 내가 갖고 있는 지도는 어제 자 지도였다. 지난 것은 버리고 새 지도를 챙겨 놓았음에도 손에 쥔 건 어제 안주머니에 품고 다니던 그 지도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 8킬로 정도 걸으면 다음 마을이 나올 거야.


은배가 말했다. 나는 쉴 때마다 무릎에 쿨 스프레이를 뿌리고 크림을 듬뿍 발랐다. 약은 꽤 효과를 발휘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도록 잘 버텨주었다. 문제는 되려 은배에게 있었다. 은배의 자세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배에게 배낭에 약이 있으니 필요하면 말하라고 거푸 일렀다. 그러나 한사코 은배는 괜찮다고 했고, 뒤에서 홀로 멈춰 서는 때가 많아졌다.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 약 먹을래요?

- 응……


나는 은배가 물에 약을 넘기는 것까지 확인하곤 배낭에 약을 다시 주섬주섬 끼워 넣으며,


- 천천히 가고 있을게요.


라고 말했다.



- 바르에요. 좀 쉬죠.


   곤사르라는 마을이었다.


- 어, 헨리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눈을 찡그려야 했지만 확실했다. 그런데 헨리 옆에 한스가 보였다. 나는 한 번도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순간 둘이 코드가 정말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슬며시 웃음이 났다. 헨리는 의자에서 자신의 배낭을 치우며 은배와 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헨리는 한스와 다음엔 어디까지 갈 것이며, 그 코스의 지형이 어떠한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사는 한스는 프랑스인 헨리와 불어로 대화했다. 그리고 오늘의 코스 숙지를 끝낸 것 같아 보였다. 이야기가 갈무리될 즈음, 헨리는 한스한테 나를 소개했다.


- 이 아이와는 수비리에서 만났어.

- 오, 너 불어를 할 줄 아니?


나를 말없이 수줍음 가득한 이로 알고 있을 한스는 헨리가 친구로서 나를 소개하자 놀란 듯 물었다.


- 아뇨, 불어는 못해요.

- 그렇구나.


바로 대화는 끊겼다. 그리고 한스가 담배를 집어 들었다.


   잠시 들른 카페 안. (이땐 혼자 걷고 있었다.) 막상 들어가고 나니 목이 마르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아서, 주인장의 눈치를 보았다.


- 크루아상 하나요. 가지고 갈 거예요.


야무지게 포장한 빵을 들고 나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카페에 좀 있다 올걸 그랬나? 더 이상 철퍼덕 앉아 쉴 곳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렇담 여기서 배까지 고프면 안 되니까 빵을 먹자! 하얀 비닐 속에 크루아상을 싸고 있던 포일을 벗겨냈다. 원체도 촉촉한데 빗물을 머금은 빵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는 비의 양이 줄어들 때를 틈타 가며 먹은 빵은 실로 맛있었다.


   은배를 만나 목적지에 도착하니 네 시였다. 접수대에선 젊은 오스피탈레로가 순례객에게 열쇠를 하나씩 주고 있었다.


- 이건 침실에 있는 개인 수납장 열쇠고요, 옆에 있는 성당에서 오늘 저녁 미사가 있어요. 가실 건가요?

- 네, 갈래요. 미사가 몇 시죠?



   전통 있는 중세시대의 성당보다는 친근한 동네 성당 같던 곳에서의 미사가 끝나고 나는 강단 앞으로 갔다. 강단 앞에는 바구니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Dios te habla. Dios te escucha.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들으십니다.)'라는 두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나는 여러 바구니 가운데 영어로 쓰인 종이가 든 바구니에 손을 뻗쳤다. 그리고 성경구절 하나를 뽑았다.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Matt 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마 5:16)"


   숙소 지하에 있는 세탁실엔 철창으로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저 뒤는 뭐로 쓰이는 공간일까? 나는 창고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곳에서 미지의 장소를 떠올리며 세탁물을 찾아갔다. 그리고 바로 앞 휴게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포토월, 샹들리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크게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따뜻했고, 이따금씩 밖을 지나 드는 행인을 보는 것은 휴식시간을 넉넉히 채워주었다. 그러다 한 순례객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저리로 나가면 어느 길로 통하게 될까? 나도 나가서 오늘 저녁 먹을 곳을 한 번 찾아볼까? 숙소의 식당은 이미 닫은 지 오래여서 나는 외식을 해야 했다.

   아랫동네는 조금 더 활기찼다. 나는 더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벌써 저녁 7시. 근처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어둑해질 무렵 스페인의 스포츠 열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약간의 술을 곁들이며 경기 중계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식사 메뉴는 관련 요소들을 갖추어 홍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박 씨 아저씨는 이 식당에 딸린 숙소에서 머무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식당 주인의 안내에 따라 건물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햄버거를 든든하게 먹고 침대에 오르자니 오랜만에 침낭에 배드 버그 예방 스프레이를 뿌리고 싶어 졌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순례길 첫날 헨리의 기침소리에 뭐 그리 예민을 떠나 하고 괜스레 더 뿌려대던 것을, 이제는 주섬주섬 겨드랑이 사이에 침낭을 끼어들고 나와 화장실에서 하게 되었다. 창문도 녹녹지 않은 곳에서 스프레이를 뿌리니 코가 간질거렸다.


- 내일은 햇볕에 말려야…… 아, 에-엣취!


헨리, 그땐 미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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