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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소민 Oct 03. 2024

오래도록 내린 눈이 녹는 계절, 엄마라는 계절

내가 이제는 주를 뵈옵나이다


매일 아침마다 남편과 20개월 아들과 가정예배를 드리는 나, 결혼 전까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한시간씩 개인예배를 드리던 나.


그런 나는 불심이 지독하리만큼 깊은, 불자집안의 큰 딸이다. 10대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부모님께는 꽁꽁 숨겼다. 도서관에 가는 척 주일마다 교회를 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교회 성가대 회계장부.. 주보.. 찬양팀 악보.. 주일학교 교재.. 성경책까지.. 방 구석 구석에 숨겨둔 흔적들을 엄마에게 여러번 들켰고, 들킨 날에는 집안이 뒤집어졌었다.


처음에는 대들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왜 나는 없느냐”며.. 엄마의 대답은 늘 같았다. “집안에 종교가 두개면 집안이 망한다. 너한테는 그 자유 없다.“ 아빠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엄마도 아빠가 알게 되는 사실이 두려우셨기에.. “아빠가 알면 너 어쩌려고 그러냐. 아빠가 알기 전에 정리해라.” 하셨다. 아빠가 알면 정말 집안이 풍비박살 날 일이기에..


(무슬림 가족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안에서 크리스천이 생긴다면..?)


교회에 자꾸 가면 찾아가겠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내가 교회에 간 날마다 희한하게 엄마가 아프기도 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교회다니는 걸 정말 꽁꽁 숨겼다. 엄마가 너무 편찮으신 날엔 교회가지 않고 엄마를 돌보기도 했다. 교회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집에 있으면 금세 엄마가 건강해졌다.


그러나 숨기고 교회라도 가면.. 엄마가 아팠다.






내가 교회에 가면 아프고, 안가면 건강하고. 그게 여러번 반복되자 그 인과성을 동생이 느꼈다. (동생은 내가 크리스천인걸 알고 있었다. 새벽기도 갔다가 돌아올때는 늘 동생이 문을 몰래 열어줬다.)


어느 주일, 엄마에게 도서관을 가는 척 거짓말을 하고 교회를 가려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나를 동생이 잡는다.


“언니 교회안가면 안돼? 언니가 교회가고 나면 나 좀 무서워..“


“그럼 너도 같이 가자. 채비해.”


“싫어.. 나 마저도 가버리면 우리 엄마 어떻게 해.”


..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나 혼자 간다고 하니 언니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냐고 가족들 속을 뒤집어놓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는 그런 분이냐며 무자비하게 화를 낸다. 또 할 말이 없다. 그때 내나이 기껏해야 10대 후반 언저리..


집에서 교회까지는 버스를 타고 약 40-50분. 집에서 무거운 걸음으로 나오다보니 교회가는 길은 늘 눈물길이었지만.. 그 날은 눈물샘이 아주 고장났나 싶을 정도로 주룩주룩 흘렀다.


그 뒤로 동생에게 새벽기도 다녀올테니 몇시즈음 문을 열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몰래 책상 스탠드 조명을 키고 눈물로 예배드렸다.


평안하고 평온한 예배시간은 아니었다. 아빠가 물 마시러 나오기라도 하면.. 엄마가 부엌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 마음 한켠이 늘 불안했다. 방 밖에서 부시럭 소리라도 나면 스탠드 조명을 끄고 후다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손에는 땀이 축축하게 났다.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두꺼운 이불 속에서 휴대폰 조명에 의지해 말씀을 봤다. 입술은 열지 못하니 온 마음으로 그러나 내 속이 터져나가게 찬양을 불렀다.






가장 많이 불렀던 찬양이 ‘예배자’라는 찬양이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이 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이 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 내가 선 이 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그 이불 속에서 이 찬양을 부르며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행여 소리가 세어나갈까 이불을 베개를 입에 쑤셔넣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동시에 내 마음에는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왜 나일까. 누구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부모님 손 잡고 주일예배가고 가정예배도 드리는데 왜 나는? 왜 나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모태신앙인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으시겠지.. 하고 그 환경을 품기에 나는 나이도 신앙도 어렸다. 이불속에서 흘린 대부분의 눈물은 원망의 눈물이었다. 꾸역꾸역 매일의 예배도 주일 예배도 드렸지만 “저도 믿는 가족 주시지 주님 왜 저는..”하는 말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내 나이였을 아빠와 나

나와 하나님 사이에 숱한 오해는 쌓여만 갔고, 끝끝내 전하지 못한 상태로 아니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못한 상태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가장 크게 무너졌던, 내 인생에 가장 깊고 어둡고 외로웠던 암흑기는 결혼 이후에 왔다. 누구는 꿀이 떨어지고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닌다는 신혼이라는데 나는 차디찬 칼바람이 부는 벼랑 끝에 매일 서있었다.


(먼 훗날 인우가 성인이 되고 내 머리에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나면.. 그때에는 더 자세히 풀어낼 수도 있겠다. 아직은 ‘벼랑 끝‘이라는 단어로 갈무리해야 할 듯 하다.)


아마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암흑기이자 신앙의 암흑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게 30대 초반에 아주 강하게 왔다. 10대때부터 쌓여온 주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도 그때 폭발했다. 간신히.. 정말 이제야 간신히.. 남들 다 태어나자마자 쉽게 가지는 ’믿는 가족‘을 어렵게 어렵게 이뤘는데 왜 내게 또 이러시느냐고.. 십대의 어린 내가 이불 속에서 흘린 눈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을 매일같이 흘렀다. 눈이 붓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정말 기적처럼 인우가 찾아왔다.


아이가 찾아오며 눈물은 거의 멎었지만.. 말씀이 상처가 되고 찬양이 마음의 비수가 되는 건 여전했다. 교회 모임에 가서도 내가 늘 하던 말은 “전 여전히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아요.. 연두(태명)에게 이런 힘든 상황을 주지 않을 힘이 내게 있다면 전 절대 주지 않을 텐데.. 왜 제게 이러시는 걸까요.. 절 정말 사랑은 하시는 건지..”


그렇게 아기를 열달 동안 뱃속에서 품었고 23년 1월 18일 새벽, 가진통이 시작되었다. 배가 아프다 말다 아프다 말다.. 식은 땀이 나게 아프다가도 사라지고 또 아프고.. 막연하게 느껴졌던 출산의 고통이 현실로 다가와 두려움이 일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수 개월만에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날 가진통을 견뎠다. 그리고 저녁 양수가 터지며 진진통이 시작되었고 다음날 새벽 인우가 태어났다. 극심한 진통 속에서도 태어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사야 말씀을 의지했다.


아니, 정말 오랜만에…

하나님을 의지했다.





출산 당일은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에야 모유수유실에서 인우를 제대로 안아보았는데, 브런치에 처음 썼던 그 글처럼, 내 입에선 준비되지 않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기도가 눈물과 함께 터져나왔다.


인우를 품에 안고 인우를 어루만지는 그 몇 분은.. 10년을 넘게 쌓아와 두껍고도 두꺼웠던 하나님과 나 사이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기에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우의 보드라운 살결에 내 마음에 얽힌 실타래가 순식간에 풀렸고, 인우의 따스한 온기에 하나님에 대한 얼어붙은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버렸다.


드디어 내 마음에 온전한 봄이 왔다. 엄마가 되고 내 인생의 황금기가 왔다는 그 말은 사실 내 마음의 모든 어두운 구석 구석들이 환하게 밝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깨달은 가장 크고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나를 단 한순간도 버린 적이 없으시다.”였다.


고양이 걸음으로 새벽기도를 나가던 그 순간에도,

방문을 걸어잠그고 몰래 몰래 말씀을 보던 그 순간에도,

이불 속에서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안가게 울던 그 순간에도,

죽으면 죽으리라 말씀을 붙들고 내가 크리스천임을 말씀드리던 그 순간에도,

결혼 후 매분 매초가 고통스러워 땅을 구르며 울던 그 순간에도,

설교가 아파 예배 시간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순간에도,

말씀을 붙들고 진통을 하던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다.

내가 울때 함께 우셨다.

단 한순간도 내게 시선을 떼지 않으셨다.

오히려 광야에서 크는 딸을 더욱 세심한 손길로 돌보셨다.







임신 9개월까지 금요찬양팀 싱어로 섬길 수 있었다. 인우에게 좋은 선물이 된 것 같아 감사하다.

인우의 태몽은 빛이다. (인우 엄마인 내 태몽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었다.)


빛으로 온 인우, 아니 내 삶의 빛으로 인우를 보내주신 “하나님”.

암흑 속에 있던 내게 하나님은 생명의 동아줄을 내려 끌어올려주셨다. 그렇게 빛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아직도 나는 인우를 볼때마다 스탠드 조명을 끄고 후다닥 이불로 들어가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른다. 깜깜한 방 안, 더 깜깜한 그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울던 때로는 목놓아 울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살아계신 주님을 이제 매일 인우를 통해 만난다. 살아계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성실히 일하시는 선하신 그 분을, 나는 이제 인우를 통해 눈으로 본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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