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까다롭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주로 엄마로부터 들은 핀잔과 걱정이다. 아마도 엄마는 나한테 맞추어 주려고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보다 나의 까다로움 때문에 힘들어했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냄새가 강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싫은 음식을 먹으면 설사를 하거나 구토를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사정을 생각지 않고 싫은 것들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급기야 음식을 몰래 버리는 일도 있었다.
먹을 것 외에도 말을 할 때도 까다로웠다고 한다.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정확하지 않은 표현은 꼭 수정을 해야 했고 틀린 평가나 지적을 받으면 반박을 했다고 한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말을 잘하는 당돌하고 귀여운 아이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태도는 말대답으로 오해되었고 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삐딱한 아이가 되었다. 엄마는 점점 나와의 차이에 지치셨고 피로감을 느끼셨다.
내가 너무 까다롭게 굴 때마다(내 취향을 주장할 때마다) '모나면 사랑받기 어렵다'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에는 이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아니라는데, 내가 불편하다는데, 내가 좋은 게 있다는데 그런 나의 취향과 요구에 엄마는 '까칠함'이라는 한마디로 정의되었다. 나란 사람의 개성이 부정당하고,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건을 살 때 점원이 골라주는 것을 거절하면 "어머! 손님 까다로우시다!". 누군가의 질문에 좋은 답변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으면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니?", 평소처럼 밥을 먹는데도 "왜? 음식이 맛이 없어?"라는 말이 잇따랐다. 내가 과장해서 리액션을 하지 않거나 순발력 있게 빨리 받아치지 않으면 나는 뭔가 불만에 가득한 사람이거나 가리는 게 많은 까칠한 사람이 되었다.
오해를 받게 되고 때로는 해명을 해야 하는 피곤한 일이 많아졌다. 자고로 엄마의 말씀은 옳았다. 모나면 사랑받기 어렵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부터 금지하기 시작했다. "모나면 안 돼. 둥글게 살아야 해. 그래야 사랑받아" 이 말을 철저히 내면화했다. 나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까다로움 숨기려고 노력했다. 내 취향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다.
마크 로스코 <United (Blue, Yellow, Green on Red> , 1954년, 캔버스 유채, 197.5x 166.4cm, 뉴욕 휘트니 미술관
까다로운 것은 나쁜 것일까?
까다로운 것은 불평하거나 트집잡거나 공격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다. 이것들은 까다로운 사람들에 대한 오명이다. 물론 공격처럼 보여지는 것은 표현의 미숙함이기는 하다. 하지만 까다롭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만족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취향,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의견이 있는 사람들이 까다롭다. 까다로운 이들은 예민한다. 작은 차이를 잘 느끼고 감각적으로 탁월한다.
미술치료를 하며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을 만난다. 이 아이들은 감각정보에 예민하다. 시각이 예민한 이 아이들은 방안의 어떤 물건이 있는지 빠르게 스캔한다. 충동적인 아이들은 덥석 잡기도 하지만 조절이 가능하면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쓸 수 있는지 요구한다. 감각적으로 예민한 좋아하는 감각을 추구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것들은 작은 차이도 민감하게 짚어내어 내 선호를 찾아간다. 특정 감각에 예민하면 새로운 것을 촉각을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불편함이고 공포이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아이들은 온몸이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감각은 내부보다 외부 자극을 통해 더 크게 느껴진다. 세계는 무한하니 말이다. 예민한 이들은 마음이 늘 편안하지 않다. 늘 자극적인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환경이 늘 불편한 것이기만 할까? 자극을 잘 느낀다는 것은 편안함이나 안정감 또한 잘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부분 이 점을 간과하여 자신의 예민함을 혐오한다. 예민한 사람들은 편안한 자극에도 반응한다. 편안함에도 더 잘 반응하고 안정감을 느낀다. 내가 까다롭다면 어떤 것에 까다로운지 그리고 그 자극이 내게 유익한지 그리고 그 자극을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외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까다로움을 무기로 살아갈 수 있다.
나도 까다로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나 역시 주변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다. 타자의 특징을 잘 관찰하고 변화에도 예민하다. 한 사람이 어떤 개성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장점이 있는지 잘 살펴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제와 달리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살핀다. 또 그 사람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를 보고 앞에 있는 장애물을 치워줄지 아니면 작은 장애물을 설치할지 고민한다. 한때 나를 괴롭히던 예민함이 타자를 향한 섬세함으로 다듬어지는 때도 많다.
마크 로스코< Orange and Yellow>, 1956, 오일에 캔버스, 231 x 180.3 cm, 뉴욕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정확하게 이해(사랑) 받고 싶다.
나는 까다로운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았다. 이들은 정확하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내가 본 것을 내가 들은 것을 내가 느낀 것을 이해받고 싶은 욕구를 누구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사람, 투정 부리는 사람, 예민한 자극덩어리라고 비난받은 서러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바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맞춰달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다만 이해하려는 노력, 알고 싶어 하는 관심, 즉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봐 달라는 말이다.
어린시절 내 까다로움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 나를 주장할 만큼 강한 성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 숨기는 것이 내 기질에 맞았다. 간혹 까다로움을 드러내곤 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한 추구는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반감을 갖거나 움츠려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드러내면서 생기는 타자의 불편한 반응도 견뎌야 했다. 이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그 괴로움을 소심하게 피해왔다.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 까다로움을 이해받은 날이 있었다. 수년 전 한 스터디에서 서로의 감정과 욕구를 유추하는 연습을 했었다. 내 파트너는 번번이 내 마음을 공감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파트너가 내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고마웠다. 그분의 그런 계속된 시도를 통해 더 정확히 내 마음을 탐색할 수 있었다. 까다로움이 서로에 대한 공격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내는데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정도로유추하고 내 생각을 물으면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정확히 내게 표현해 주었다. 그렇게 상대의 마음을 알아가고 나의 마음도 알아갈 수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며 더듬더듬 찾다가 손이 스치는 환희의 순간 같았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려는 노력 만으로도 그 계속되는 연결감 만으로도 이해받은 느낌이 들었다.
마크 로스코 <No.14>, 1960, 오일에 캔버스, 290 x 268 cm, 샌프란시스코 뮤지엄
예술과 만나는 순간, 모호함은 정확한 감정이 된다.
예술과 만날 때도 나는 이해받는 느낌이 든다.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기쁨과 슬픔을 대신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보통 사람들이 지각하지 못한 것들을 앞서 느끼기도 한다. 그런 예술가들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들의 예민함이 오히려 편안해지기도 한다. 칠흑같이 시커먼 어둠을 보며 내 심연의 방황을 만나기도 하며, 날카롭게 베이는 형태를 보고 나면 내 마음의 상처가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아 아프다. 부드럽게 천천히 스미는 그림을 보면 내 마음도 아득히 그리웠던 기억이 피어난다. 내가 잃어버린 것, 내가 감춰 두었던 것, 외면받았던 것, 나조차 다 꺼내보기 힘들었던 것들과 마주한다. 내 속에 있는 마음을 만나고 나면 그것이 어둠이건, 상처건, 고통이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내 마음을 머물다가 떠난다. 그렇게 내 마음은 비워진다. 다시 새로움을 채울 채비를 하게 된다.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림은 그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 앞에서 열린다. 알 수 없는 모호한 형태가 내게서 정확한 감정이 되어 퍼질 때 그림과 나는 만난다.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 느꼈던 종교적 경험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언어라고 해서 복잡한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는 시인의 경험과 감정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알쏭달쏭 간지러운 시 문구를 어느 날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 그때 그 시구는 나의 기억의 문을 연다. 나는 그 언어를 통해 나의 경험과 감정의 시간들이 펼쳐지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과 홍차향기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열린 주인공처럼 말이다. 예술작품이 정확히 내 기억과 삶을 읽어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예술을 통해 감동받은 순간, 내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예술가와 통한 것이다. 나는 그때 예술을 통해 정확히 이해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응어리는 풀어진다.
예술과 단박에 만나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무언가 충격이 온다. 기쁨이던 슬픔이던 충격의 여파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때 일어나는 파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림과 나 사이의 불일치를 찾으려 한다. 그림과 나와의 불일 치 속에 새로운 상상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그 빈 여백의 공간 속에 너와 내가 만날 수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비언어적으로 감각적으로 통하게 된다.
마크 로스코 <Untitled Mural for End Wall> 1959
예술을 대하는 마음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흔히 사용하는 '까다롭다'는 표현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보편의 법칙에 들어오지 않아 다루기 쉽지 않아 쓰는 말이다. 나는 '까다롭다'는 말에 갇혀 살았다. 까다로운 사람은 불편한 사람이라는 편견 속에, 나를 드러내면 불편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그래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 속에 살았다.
나의 까다로움은 단순한 반응 흔히 생각하는 신경질이나 짜증이 아니다. 나를 발산하고 수용하는 과정, 표현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까다로움이 있다. 나는 그런 작은 차이를 견주는 과정을 즐긴다. 내가 경험한 것을 누군가 관심을 가져줄 때 정말 기쁘다. 그리고 너의 취향을 내가 알아챘을 때도 마찬가지다. 기꺼이 너의 취향을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내 까다로움이 가장 날 설 때는 마찬가지로 사랑할 때다. 사랑받고 싶을 때 내 까다로움은 날이 선다. 정확히 이해받고 싶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꼭 정확해야 하는 것일까? 한때는 왜 정확이 몰라주나 하는 생각에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덜 표현했나 싶어 나를 검열했고 내게 관심 없나 하며 상대를 의심했다.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나를 표현하려 애썼다면, 너 역시 너의 최선을 다해 나를 이해하려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구체적은 무엇, 정확한 그것에 집착했던 것 같다. 정답을 정해놓고 말이다. 너와 나의 교감은 추상화처럼 형태가 분명한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 모호함 속에 정확한 감정이 만나게 되는 것일 텐데 말이다. 마음에 답을 정해놓은 집착이 오히려 사람과의 감정의 교류를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함은 고정된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의 흐르는 감정이었다. 수많은 색으로 덧칠된 시간이었다.
한 사람도 하나의 예술이다. 수많은 기억, 수많은 감정, 수많은 경험이 겹겹이 덧칠해진 예술작품이다.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그 작품의 의미가 열리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다. 사람도 볼수록, 볼 때마다, 그리고 오래 알수록 다르게 다가온다. 사람과 만나는 일도 예술을 만날 때처럼 만난다면 어떨까? 늘어놓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표정이 아니라 내 눈에 지각되는 것뿐 아니라 그림이라는 결과 이면의 과정을 보려 노력한다면, 그 피,땀 눈물을 상상할 수 있다면, 겹겹이 칠해진 밑색을 엿볼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는 예술을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까다로운 감성을 가졌다. 그리고 나의 까다로운 감성은 예술을 이해하는데 적합했고 예술을 만나면서 더 단련되어 간다. 나의 감수성을 예술이 아닌 사람에게 돌려 본다면, 이 세계로 돌려본다면 어떤 환희를 만나게 될까. 창조 그 자체인 이 세상은 얼마나 경이로울까. 미술관 밖으로 지각을 넓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