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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21. 2023

마크 로스코(1) 감정의 울림

개별적 경험이 보편적 감정이 될 때



<No.3/No.13 (Magenta, Black, Green on Orange)>, 1949, 216.5x164.8cm, 캔버스에 오일, MoMA 



울컥 거리는 색채 덩어리


성인의 키보다 큰 높이 2M가 넘는 크기의 캔버스에 색채가 덩어리로 칠해져 있습니다. 붉은 오렌지 바탕 위에 자줏빛 나는 핑크색, 검은색, 그리고 녹색이 올려져 있습니다. 유화 물감을 오일로 희석하여 얇게 펴 바른 후 오일이 마르기 전에 다시 다른 색을 올리고 또 색을 올리면서 겹칠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마치 한지에 먹이 먼지는 것처럼 캔버스에 색이 스며들면서 자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마르지 않은 밑색은 올려 칠한 윗 색과 합쳐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고 흘러들어 간 자국입니다.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 붉은색이 계속 확장되는 것 같다가도 검은 심연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각형의 구도에 갇힌 것 같으면서도 가로로 무한히 확장되는 수평선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강렬한 대비 속에서 에너지가 폭발될 것 같지만 무언가 더 큰 힘에 의해 감정이 조절되고 다독인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색이 번저간 자국 속에, 색이 겹쳐지며 밑색이 겹쳐 보이는 장면 속에, 살금 거리는 붓질의 한올을 발견한 순간, 색들이 물컹물컹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찰나 심장이 빨라지기도 하고 호흡이 조금 더 거칠어지기도 합니다. 이토록 부풀어 오른 그리움을 본 일이 없습니다. 초록이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더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자줏빛 핑크는 그 빨강을 더욱 증폭 키려 하지만 검정은 흰색은 터질 것 같은 환희를 깊숙하게 눌러줍니다. 큰 그리움으로 가득 찼던 그 순간이 감정이 떠오릅니다. 환희에 차올랐지만 끝나고 마는 그 순간. 생명이 타오르다 멈춰진 그 순간이 떠올라 비애의 감정에 젖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어떤 기억의 장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공간적인 이미지로 잡아 낼 수 없는, 특정 단어로 가두어 둘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차오릅니다. 머릿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무언가로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숨결은 물감처럼 오일에 젖은 캔버스를 타고 스미듯 흘러갈 뿐입니다. 통제되지 않고 의도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나는 색과 형태의 관계를 보여주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마크 로스코


추상과 표현을 통한 소통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년)의 작품입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추상'과 '표현'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미술사조입니다. 외적 대상이 아닌 내적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한 것이 표현주의라고 부르며, 이 표현의 방법을 '추상'적 기법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립니다. 추상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 추상적 기법은 대상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형태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선이나 색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크 로스코 작품에서의 추상은 인간 내면의 감정을 색으로 추출하여 외부로 표현했기에  '추상표현주의'라는 평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크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기존의 추상주의자들이 사물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추출하려 했다면 로스코 자신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기존의 추상이 사물을 생략하여 그림으로써 대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수 만을 남겨두는 것이라면, 마크로스코의 작품은 생략하는 것이 아닌 감정 그 자체를 직관적으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그림에서 작가의 '자아'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평론가들은 로스코의 작품을 해석하며 로스코의 생각, 철학, 감정을 유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스코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하길 원했습니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관객 자신의 경험과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자신과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이 작품을 그린 작가 자신과도 만나게 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가 됩니다. 로스코는 작품과 관람객의 소통, 관람객 자기 자신과 소통, 그리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통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느꼈던 종교적 경험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Orange and Yellow>, 1956, 오일에 캔버스, 231 x 180.3 cm, 뉴욕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Violet, Black, Orange, Yellow on White and Red> 1949, 214.5 x 174 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보편적 감정과의 소통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린 관객들이 많다고 합니다. 미국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나요?'라 질문의 설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문에서 눈물을 흐른 적이 있다고 한 응답자 중 70%는 바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통해 그러한 경험을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2005년 한국에서 전시를 진행했을 때도 몇몇 유명인이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도자료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신체가 요동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기억이 생각났다거나, 무엇 때문이라고 인식하기 어려운 부지불식 간의 순간에 왈칵하고 감정이 올라올 수도 있고, 혹은 깊은 호흡이 쉬어지면서 서서히 그림에 젖어들 때도 있었습니다. 설명하기 힘든 모호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이때 온몸으로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술작품을 시각뿐 아니라 온 촉감으로 더듬거리며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몸을 더듬을 때 네가 이래서 좋고, 너를 만지며 생각이 든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또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처럼 몸이 감각하는 느낌은 언어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호한, 경험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느꼈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로스코는 자신이 작품을 하며 비극적 감정과 환희에 대해 느꼈으며 이와 같은 감정을 관람객 또한 같이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신에 작품에 대한 언어로 해설 대신 관람객이 잘 감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제안했습니다. 그림의 위치를 갤러리 바닥에서 15cm를 띄우고, 조명은 어둡게,  관람자도 작품과 45cm의 거리에서 가깝게 관람하라고 했습니다. 그림과 최대한 가깝게 위치하여 색채를 좀 더 생생하게 느끼길 바랐습니다. 그림과 가깝게 소통하길 바랐습니다. 영혼대 영혼으로, 호흡대 호흡으로, 마음대 마음으로 만나길 바랐던 것입니다. 


로스코는 관람객에 해설을 제공하는 것은 미술의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해설'은 언어로써 표현됩니다. 언어라는 것은 무의식적 사고의 작용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입니다. 미술이라는 색의 기호를 문자라는 언어 통해 다시 기호화시키는 것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해석'은 미술의 언어를 문자화된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와도 비슷합니다. 순수한 우리말을 외국어로 표현할 때 그 맛이 잘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는 번역하는 그 주체의 정체성, 성향, 관점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기에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이 어떤 번역도 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에서 관객과 만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색은 문자화된 언어가 필요 없는, 관습이나 문화도 뛰어넘는, 역사와 시간도 뛰어넘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울리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United (Blue, Yellow, Green on Red)>, 1954년, 캔버스 유채, 197.5x 166.4cm, 뉴욕 휘트니미술관


<No.1(Red, blue, Green)>, 1953년 캔버스 유채, 205.7x170.2cm, 케이트 로스코-프리첼 컬렉션



감동은 신체가 반응하는 것


로스코의 그림은 '침묵'과도 같습니다. 침묵의 의미를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침묵은 침묵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상 속에 머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침묵은 잠잠한 상태입니다. 잠잠함은 잠기는 것이 이고 마음을 가라 잊히는 일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자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로스코의 작품은 관람자의 마음을 잘 비추어 줍니다. 그의 작품에 비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환희와 비애, 기쁨과 슬픔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일렁인다면, 그때가 작품과 만나는 그 순간입니다. 색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색채의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그림을 이해하게 되고 위로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림을 알아보는 순간, 그림은 내게 위로가 됩니다. 그렇게 그림과 함께 울리게 되고 그렇게 공명이 이루어집니다. 


감동은 감정이 울리는 것입니다. 꼭 눈물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호흡과 신체가 반응하고 있는지 알아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호흡의 세기에 변화가 있다면, 내 심장의 박자가 바뀌고 있다면, 내 동공이 어딘가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작품과 함께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작품을 통해 내 몸이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직접 만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신체가 동요된다면 같은 감정으로 울리게 됩니다. 로스코의 그림은 내가 만지지 않았더라도, 내가 소유하지 않았더라도 그저 아름다운 광경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온몸이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너로 인해 내가 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이 주는 파장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나의 파장, 그리고 만난 적 없는 작가의 파장, 그의 작품 앞에 온몸이 울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파장과 함께 우리는 같이 진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마다의 개별적 감정으로 그림 앞에 섰을 테지요. 작가도 작품을 만들며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이 환기되었을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관람자들도 그림을 보며 저마다의 기억과 감정을 재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별적인 시건들은 그림을 통해 자극받게 됩니다. 문화, 관습, 성별, 나이, 역사 등 수많은 조건을 초월하여 가지고 있는 근원적 감정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로스코는 인류가 가지는 보편적 감정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로스코는 내게 있었던, 그리고 네가 있었던 삶의 한 조각이 같은 부분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개별적인 '나'들은 감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우리'로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를, 또 다시 너를 울리게 됩니다.


<No. 14>, 1960, 오일에 캔버스, 290 x 268 cm, 샌프란시스코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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