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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23. 2023

마크 로스코(2) 비극에 대하여

초기작품들

로스코의 작품에는 '비극성'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의 '비극'은 '인생의 슬프고 애달픈 일을 당하여 불행한 경우를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이처럼 파멸, 패배, 죽음 등의 불행한 결말을 맺는 극형식을 '비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관람객의 그의 작품을 통해 비극을 느꼈다면 로스코 역시 작품을 감상하며 비극적 경험을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로스코는 비극적 경험과 정서를 왜 캔버스에 그려 넣었을까요? 로스코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비극적 감정에 천착했던 것일까요? 우리 인생에서 비극이라 함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화상>, 1936년


러시아에서의 차별... 미국으로 이주


로스코는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라는 이름으로 1903년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러시아 에서는 '유대인을 죽여 러시아를 구하자'는 슬로건이 횡횡할 정도로 유대인은 학살의 공포 속에 있었습니다. 로스코가 유대인 대량 학살을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스코가 살던 지역에서는 유대인을 죽여 파묻던 곳이 인근에 있었으며 그러한 죽음의 기억이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코가 7살이 되던 해야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를 결심합니다. 로스코 가족은 미국 오리건주에 자리를 잡게 되지만 아버지는 미국에 온 지 7달 만에 사망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러 나갔고 로스코 또한 친척의 창고에서 일하거나 신문팔이를 해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차별로 예일대 자퇴... 그림과의 우연한 만남


로스코 가족은 생계가 점차 안정이 되었으며 예일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일대학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로 장학금 지급이 취소되게 디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고향 러시아에서도 차별과 학살을 피해 미국에 왔지만 미국에서도, 그것도 미국의 최고 대학인 예일대에서도 유대인 차별이 계속되던 것에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에 상심한 로스코는 뉴욕행을 결심하고 친구가 있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생들이 누드모델을 드로잉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로스코는 "이것(미술)이 나의 인생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로스코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를 다닌 후 뉴욕 디자인 학교에 등록을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미국인 화가 맥스 웨버의 수업을 듣게 됩니다. 맥스 웨버는 미술 작품 속에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예술이 갖는 정서적 힘과 영혼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위버의 낭만적 이상주의는 로스코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막스 웨버, <Burlesque> 1909, 캔버스에 유채, 38.7X46.4cm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


로스코의 초기작에서는 차갑고 어두운 정서가 많이 느껴지곤 합니다. 특히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주제로 한 시리즈를 여러 점 남겼습니다. 지하철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맞이한 듯 두꺼운 옷을 입고 있으며 지하철 기둥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을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기만의 공간에 고립되어 소외감과 우울한 정서가 느껴집니다.


로스코는 당시 1차 대전 이후 대공황을 겪고 있는 사회상을 작품에 반영하려고 하였으며 인물의 묘사가 길쭉하게 왜곡되어 초현실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거리 풍경>에서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무언가를 피해 숨죽이며 도망가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감정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그림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에 앞서 로스코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되었다고도 보입니다. 이민자로서 살아온 자신이 느끼는 소외감과 방황을 지하 세계라는 은유적 공간을 차용해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제 (지하철)>, 1937, 캔버스에 유채, 51.1x76.2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거리 풍경> 1937, 캔버스에 유채, 73.5X101.4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비극이라는 인간의 조건


1932년 주얼리 디자이너인 에디스 사차를 만나 결혼을 하였으며 1938년에는 미국 내 유대인 추방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끼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이름도 마크 로스코로 개명을 하게 됩니다. 잘 나가는 주얼리 디자이너인 에디스와는 달리 무명화가였던 로스코는 경제적 문제를 갈등하였습니다. 이 둘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후 로스코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로스코가 개인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맞물려 세계적으로는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예술가들은 그림의 주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터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꽃이나, 누워있는 누드 같은 것을 그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로스코는 비극적 상황을 현실의 장면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표현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신화'를 주제로 선택하게 됩니다.


<안티고네> 1939-1940, 캔버스에 목탄과 오일, 86.4 x 116cm.


로스코는 신화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저서들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꿈이 해석 그리고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1856-1939)가 무의식을 개인적 차원에서의 억압된 욕망과 기억이라고 보았다면 융(1875-1961)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에게는 옛 조상이 경험했던 의식이 쌓여 있으며, 이는 개인적 경험아닌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정신의 경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상징을 통해 전승되며 이것은 신화, 전설, 민화의 형식에서 무의식의 원형이 녹아들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로스코는 신화를 통해 원시적이고 격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모든 문화와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를 지니고 있기에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로스코의 작품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BC 497/6~BC 405/6)의 비극 <안티고네>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과 함께 오이디푸스 가문의 2대에 걸친 비극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끔찍한 신탁이 내려지게 됩니다. 이런 운명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지만 결국 신탁의 내용대로 되고 맙니다. 오이디푸스는 이런 사실의 전모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신의 눈을 찔러버립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가 모두 사망하게 되고 권력투쟁의 자리에 딸 안티고네와 안티고네의 약혼자가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들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속 인물들은 계속 충돌하고 갈등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파국을 지켜보단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고칠 줄 알고 고집을 피우지 않는 자는 더는 조언과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오. 고집만이 어리석음의 죄를 짓게 되는 것이오” 인간의 불행은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을 통해 운명의 힘 앞에 파멸해 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인간이 지닌 존엄성과 이성을 믿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이 왕의 자리를 물러남은 물론 자신의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고자 합니다. 고통을 통해 인간됨 지켜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 역시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꺽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죽음도 감수하는 이성적 판단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진정한 비극이란 고통스러운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인간됨을 지켜내려고 하는 인간의 고결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로스코는 이러한 점에서 "비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로스코는 유대인 출신의 이방인으로써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비애감과 소외감 그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 운명의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인간됨을 지켜내려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고결한 인간의 태도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로스코의 이러한 비극에 대한 정서는 이후 추상화 작업에서 더욱 함축된 시적 언어로 발전합니다.


<Untitle>, 1948년, 캔버스에 유채, 127.6 X 109.9cm, 케이트 로스코-프리챌 컬렉션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어쩌면 자기 삶의 비극성을 만났기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과 직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가 테이레시아스의 음성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스코의 작품이 제 가슴을 울리던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무렵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의 사랑과 미움의 마음이 솟구쳤으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내게 테이레시아스가 해준 예언은 '우린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모두 한계가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었습니다. 나의 실존적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스코의 그림 속에서 지난 삶이 남긴 자국들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감은 경계 없이, 통제 없이 제멋대로 흘러갔지만 깊은 흔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자국들을 만들어 냈고 그 자국들은 그것으로 캔버스라는 나의 인생을 황홀하게 물들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내 삶은 무언가의 자국을 내며 그 위에 계속된 덧칠을 해나가게 되겠지요. 수많은 경험과 감정으로, 수많은 사람들과의 사랑의 사건들로, 또 다른 이별과 슬픔의 비애를 맛보며 감정이 하나씩 겹쳐지면서 오묘한 색이 만들어질 테지요.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며 고통 또한 내 삶의 발색임을 인정했을 때 우리의 삶은 더 깊고 빛나는 색채를 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색이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깊은 심연을 들어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Blue and Grey > 1962, 캔서스에 유채,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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