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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Oct 27. 2024

기억해야 할 것들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추모하며

늘 그랬던 기억 : 익숙한 금지와 통제


지난달 중학생 딸이 10월에 있는 한강 불꽃놀이 축제에 친구와 가도 되냐고 물었다. 서울나들이를 많이 해오던 터라 자신의 일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형식적 질문이었다. 나는 불꽃놀이 축제 → 사람 많은 곳 → 이태원 참사를 연쇄적으로 떠올렸다.


"안돼! 가지 마!"  
"왜?"
"사람 많잖아. 이태원 참사 기억 안나니?"
"이태원이랑 불꽃놀이랑 무슨 상관이야? 사고가 있었으면 더 조심하고 단속하지 않을까?"
"미안하다. 엄마는 지금 사회를 믿을 수가 없어."
"억울해. 왜 내가 늘 조심하며 살아야 해?


아이의 푸념을 들으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외출을 허락하고 난 후 하루종일 걱정이 되는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알았다. 10월 29일에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내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삶은 더욱 불안해졌고 위축되었고 소심해졌다.


사건이 일어난 2년 전만 해도 뉴스에서 사건이 계속 보도되면서 그 슬픔이 잘 가시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 중에 사고를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어서 그런지 관련 뉴스를 보면 마음이 조여왔다. 뉴스에서는 트라우마를 우려하여 뉴스장면을 보는 것을 자제하라고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참상에 대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경험했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매우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삶 속에서 빠르게 잊혀 갔다. 한 언론사에서만 이 사건을 끈질기게 다루었다. 아침에 자주 듣는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서는 사고 희생자의 유가족과 매주 인터뷰를 가졌다. 희생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유가족은 어떻게 지내는지를 인터뷰했다. 그 방송을 너무 듣기가 힘들었다. 그 고통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인터뷰를 듣고 나면 다시 가슴이 죄여오고 눈물이 터졌다. 아침부터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하루가 힘들어졌다. 나는 방송을 멀리했다. 그러면서 죄책감이 생겼다. 경청과 공감을 원하는 목소리가 힘들어서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났다. 그리고 딸아이와의 갈등을 통해 이 사건이 내가 도망갈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갈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 사건이었다. 그날의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었다.




너의 기억에 경청하기 : 함께 느끼고, 함께 이겨내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두 권의 책을 빌려왔다. 이태원 참사 당사자들의 인터뷰 집인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와 참사 당사자가 직접 쓴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를 읽었다. 글을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너무 힘들었다. 슬픔에 가슴이 메이기도 하고 이 고통을 이제야 알았나 싶어 미안해지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은 나만의 애도 의식을 치르기게 했다. 미술을 마음을 돌보는 도구로 사용하는 나는 익숙한 도구를 꺼냈다. 미술이 내 상처를 들여다보고 위로해 주듯이 타인의 상처도 내 것으로 느끼고 공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A4 지를 들고 자주 다니는 동네로 갔다. 동네 주민이 많이 다니는 길, 아이들이 통학로로 이용하는 그 길에 멈추었다. 이태원이라는 특별한 동네가 아니더라도 그 사고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사고였다. 나는 자주 다니는 길에 주저앉아 아스팔트 위에 놓인 종이를 긁었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며 긁었다. 종이는 생각보다 질겼고 잘 찢어지지도 않았다. 강한 힘이 가해지고 나니 종이는 조금씩 해지기 시작했다. 거친 바닥의 촉감이 몸에 전해졌다. 마음이 긁히는 것 같았다. 한 장이 끝나면 다시 한 장, 다시 한 장, 장소를 바꾸며 여러장을 긁었다.


벽돌이 깔린 보도 블록에 앉아 종이를 긁고 있는데 벽돌 무늬가 드러났다. 종이가 찢어질 것처럼 긁던 힘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심스럽게 돌의 무늬를 찾았다. 마치 프로타주를 하는 심정으로 벽돌의 무늬를 찾았다. 그리고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도 발견했다. 뜻하지 않게 무늬를 발견하며 이 행위는 슬픔을 위한 슬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여진 슬픔이 당시 길에서 있었던 일의 진실을 밝히 새로운 싹이 자랄 틈을 발견하게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이 일을 기억해야 하는것이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기억 만들기 : 나도 지금 이태원이야


밖에서 작업을 하고 나서 몸이 좀 힘들어졌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웠다가 갑자기 이태원 참사 당사자중 한 분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올해도 핼러윈 파티를 즐기러 나가겠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대체 이태원은 어떤 곳일까? 책 내용 속에서 이태원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곳' '서울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청년세대들도 빠른 성장과 경쟁 속에 짓눌려 있었고 숨 쉴 공간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중 한 곳이 이태원이라고 했다. 이태원은 어떤 곳일지 궁금해졌다.


며칠 뒤 이태원으로 향했다. 사고가 있었던 1번 출구에는 슬픔의 기운이 가득할 것만 같아 긴장이 되었다. 계단을 통해 지하철 출구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사고가 있었던 그 골목은 생각보다 좁았다. 그 좁은 장소가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골목을 지나 다른 골목을 걸었다.  시간이어서 대부분의 상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일부 식당에서만 손님을 고 있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산책 나온 청년들도 보였다. 그날 햇빛과 바람이 유난히 좋았다. 이태원의 길가도 반짝거렸다.


이태원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자주 놀던 그런 분위기였다. 젊은 시절 추억도 스치면서 밤에 이곳에 오면 정말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색적인 분장을 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친근하게 대화하고 사진 찍으며 웃고 떠드는 그런 축제의 풍경이 떠올랐다. 이곳 참사가 있었지만 슬픔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웃음의 공간이며 젊음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통제당하고 금지당했던 기성세대인 나는 또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구실로 조심하라고만 가르치려고 했다. 어른들은 억압하고 통제하고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대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고심을 더 해야 한다. 책임질 사람들이 제 몫을 감당하여 하고, 국가적 시스템의 정비도 필요하다. 얼마전 발촉된 이태원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그 임무를 수행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날의 이야기를 좀 더 경청해야 한다. 관련된 장소와 행사를 터부시 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른 세대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 하려 애써야 한다. 서로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때 서로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게 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긁어서 해진 종이를 다시 꺼내었다. 그리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슬픔을 함께 느끼고 함께 기억하겠다고, 슬픔 너머를 상상해 보겠다고. 냉소적인 무기력에 빠지지 않겠다고, 더는 부끄럽지 않기 위한 다짐을 했다. 이태원의 좁은 골목, 책에서 만난 당사자들의 목소리, 위축된 나를 비추던 따스한 가을 햇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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