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관에서는 '연결'을 주제로 한 소장품展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전시를 진행했다. (11월 7일 종료) 이 전시는 집단성으로는 묶이지 않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전시의 제목인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캐시 박 홍의 자전적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의 문장을 인용한 말이다. 캐시 박 홍은 저서에서 자신은 이민자로서 서구 사회의 이방인이었으며, 동시에 이방인 사이에서도 집단화되지 못했던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라고 적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일까?
한국은 '우리'를 강조하는 사회이다. 한편에서는 집단성으로 인해 개인성을 억압받으면서 '우리'가 아닌 '나'를 사랑하자고 외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나'들이 연대하여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전시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우리의 범주, 우리의 정의에 대해 묻는다. 언뜻 '우리'는 따뜻한 연대의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라는 단어의 상대적인 말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섬찟한 말이 될 수도 있다. 내 편,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을 '우리'의 범주로 포함시킬 때,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 나와 같은 조건인 사람만이 '우리'라면 '우리'로 인해 '너희'를 가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진정 사랑하고 싶은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 친숙하면서도 낯선 것까지
전나환의 작품은 나와 다른 타인으로써의 '우리'가 아닌 내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내 안에 있는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나환의 작품을 보자. 전시장에 한편에는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방은 무대가 있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대기공간의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다. 한쪽 벽에는 이태원 클럽의 입장권 팔찌가 걸려있고 맞은편 벽에는 <아네싸의 방> 영상과 <아네싸의 초상>이 걸려 있다. 아네싸는 누구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방 속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쪽 깊숙한 방에는 큰 영상이 출력되어 있었다. 영상 속에서는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전나환〈For a flash>, 2021
그곳은 어두운 클럽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 바닥에 X표시를 하며 거리 두기를 했던 표시가 군데군데 있었고 바닥에는 은색 반짝이 조각이 한가득 뿌려져 있었다. 큰 스크린 속에서는 드래그 퍼포머인 홍일표 씨가 분장을 하고 있다. 드래그(Drag)는 본인의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성(性)에서 벗어나 다른 성의 의상, 메이크업, 행동 등을 차용하여 꾸미는 행위를 말한다. 홍일표 씨는 코로나 시기에 극장이 폐쇄되었을 때도 영상에서 처럼 출근하여 홀로 분장하고 아네싸를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아네싸는 홍일표 씨의 또 다른 '나'인 것이다.
전나환〈For a flash>, 2021
길에서 만나면 평범한 청년인 홍일표 씨는 무대 위에서는 아네싸가 된다. 그는 코로나로 인해 폐쇄된 극장에서 빈 객석을 바라보며 무대에서 홀로 아네싸가 된다.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나'는 또 다른 '나'를 무대에 등장시킨다. 아네싸로 공연을 마치고 피날레에 뿌려진 은빛 반짝이 가루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아네싸도 홍일표도 아닌 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드래그 퍼포머라는 이름에 가려진 한 사람, 화려함에 가려진 한 사람, 편견에 가려진 한 사람이 있었다. 홍일표 씨는 그야말로 밭을 가는 농부이 마음으로 말 그대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네싸가 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무대 위에 사람에게서 책임감, 진지함, 성실함, 고단함, 고독함이 전해왔다.
전나환 <아네싸의 방>, 2021
드래그 퍼포머 홍일표 씨는 <아네싸의 방>에서는 캐릭터인 아네싸에 대해 설명한다. 아네싸가 되기 위해 준비한 가발, 의상 소품들을 보여주고 어떻게 아네싸라는 캐릭터가 되었는지, 그리고 아네싸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말한다. 홍일표 씨는 아네싸를 위해 산다고 했다. 아네싸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산다고 했다. 낮에는 다른 일을 하며 아네싸를 위해 쓸 돈을 마련하고, 시간을 들여 아네싸를 연구하며 아네싸를 돌본다고 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처럼.
'우리'의 다름은 '돌봄'을 통해 통합된다.
홍일표 씨의 인터뷰를 보며 내 안에 '아네싸'를 상상해 보았다. 내 안의 누구를 돌보고 싶을까? 누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을까? 내 안에 소외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자기 안에 자신은 드래그 퍼포머처럼 반대 성(性)으로 표현하는 결과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네싸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홍일표 씨는 아네싸를 행복하기 위해 고심한다. 어떤 화장, 어떤 의상, 어떤 제스처를 취할지 고민하며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창조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내 안에 나는 찾아봐주고 들여다보고 키우고 돌보며 창조해 가는 것이다. 내 안에 아네싸는 무의식이 올라오는 순간 모습을 비춘다. 그것은 때로 격정적인 감정으로 혹은 두려움으로 혹은 끌림으로, 낯선 충동으로 인식된다. 그 충동은 의식의 나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자기 안의 분열을 통합시키는 방법을 전나환의 작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돌봄'이다. 부끄러워 숨기지 않고, 못 본 척 무관심해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자신 안의 '나'를 돌보는 것이다. 자기 안에 낯선 타자를 돌보는 것은 결국 우리를 사랑하는 시작이자 전부이다. '나'안에 낯선 이를 돌볼 수 있을 때, '나' 바깥에 낯선 이를 '나'처럼 사랑할 때, '우리'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익숙하지는 않더라도 낯설더라도 잠정적 '우리'가 된다. 함부로 대하거나 무관심질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닮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너를 사랑하는 일이다.
덧붙임. 소수성과 관련된 글은 조심스럽다. 많은 경우 망설이다 쓰지 못했다. 잘못 알고 있어서 상처 주면 어쩌지라는 걱정, 타자화 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는 자기 검열이 늘 따라왔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무관심해지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무 말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싫다. 정확히는 세상의 아우성 속에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싫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음소거된 세상에서 어지럼증을 느낀다. 만일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그 오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나와 너의 위치를 알고 싶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알고 싶다. 그 거리에서 우리의 만남이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아직은 저만치 있다. 흐릿한 '너'를 본다. '너'를 만나고 싶다. 낯선 '너'를 만나고 싶다.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오해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