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도 긴 시(時)선
오늘도 수많은 삶이 피어나고 진다. 단순히 탄생과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긴 삶 속에서 누군가는 호재를 만나 삶이 잠시 피기도 하고, 악재를 만나 잠시 지기도 한다. 계절이 지나가고 돌아오듯 삶이 피고 지는 것은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삶이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우리는 단박에 알 수 없다. 삶은 수많은 사건이란 점으로 이루어진 점묘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과 누군가의 삶을 평가할 때 그가 겪어온 분절된 사건의 집합으로 평가한다. 시간이 캔버스라면, 사람은 그 위에 사건들을 점으로 찍는 것이다. 24시간 내내 cctv를 들여다보듯 누군가의 삶을 보고 있을 수 없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린 삶을 감상하며 한 삶의 흥망을 논한다.
점묘화 속 어떤 한 점이 누군가의 삶에서 피는 순간인지 지는 순간인지를 판단하려면 죽음이라는 끝이 필요하다. 점으로 이루어진 점묘화가 죽음으로써 완성되어야만 우리는 한 삶의 굴곡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삶이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를 당장에는 알 수가 없다. 좋은 일이라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안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라 해도 결국에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부각하여 보는 본능이 있기에 분절된 순간의 사건만으로는 객관적으로 삶을 평가할 수 없다.
삶이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을 때는 안 좋을 때를 생각하고, 안 좋을 때는 좋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 잘 풀리는 시간은 결코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시간이 아니며, 예상하지 못한 일로 안 풀리는 시간은 결국 지나가는 긴 시간 속의 한순간이다.
좋은 일이 찾아들면 나의 노력보다 주위의 환경을 조금 더 되돌아보자. 물론 스스로의 노력이 그 좋은 일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겠지만, 노력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모든 종류의 희생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희생해 준 것들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더 자주 좋은 일들을 선사할 것이다. 피하고 싶지만, 안 좋은 일 역시 우리를 찾아온다. 스스로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반성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프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훗날 그 순간을 삶이 잠시 졌다가 피어나는 순간으로의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겪는 안 좋은 일은 어떻게 할까. 그 어떤 이유로도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버티자. 구름이 아무리 하늘을 뒤덮어도 결국 햇빛은 드는 법이다. 좋은 일들이 삶을 채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버티다 보면 구름은 알아서 걷힌다.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의 점묘화일까?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피어나고 있을 수도, 또는 잠시 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란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 남은 모든 고통과 깨달음은 남은 삶을 살게 하는 양분이 되고, 이전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 앞에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피고 지는 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