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강사님의 현장강의 후기
몇 주 전, 군내면사무소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다. 진도군에서 군민 리더대학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가입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빠죽겠는데 무슨 교육까지 다니겠나 싶었는데, 김미경 강사님도 오신다는 것이다. 정말 바빠죽겠어서 점심을 거르는 날도 부지기수인 요즘인데 김미경 세 글자에 가입원서를 보냈다.
그렇게 오늘 김미경 강사님을 뵙고 왔다. 사진, 영상 등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사전에 안내를 받아서 핸드폰은 넣어놓고 오로지 눈과 귀로 집중했다.
왜 아직도 김미경, 김미경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마이크 하나만 들고서 물 흐르듯 쏟아내는, 아니 '빚어내는' 시간들이 참 경이로웠다. 이틀 전에는 나도 강의를 하고 왔다. 온 식구들이 죄다 밭에서 홍감자를 캐고 있었는데, 미리 부탁을 받은대로 농진청(정확히 말하면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우주최강 가족농부 진도농부의 이야기를 빚어내고 왔다.
김미경 강사님께서는 원래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대출까지 받아 시작한 학원인데, 하나둘씩 그만둔다는 원생들이 생겨서 학부모님께 눈물겨운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했다(손편지? A4 2장? 나는 3장이었는데? 여기서부터 왠지 반가웠다).
그 손편지를 받아 감동을 한 엄마들은 심지어 다른 학원의 아이들까지 몰고 와서 금새 작은 학원이 200명까지 찼다고 했다. 성공적인 스토리 덕분에 학원협회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는데 또 소문이 나서 나중에는 삼성생명에서 고객만족, 고객설득 등의 주제로 강의까지 하셨다고 했다.
'나는 강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곁에 있던 남편분께서는 회의적인 반응이셨나보다. 하지만 강사님의 아버지께서는 "남편은 너를 가장 사랑할 수는 있지만 너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너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참 잘하는 아이였다고 강사님의 새로운 꿈을 응원해주셨다고 했다.
사실 빡세게 일하다 와서 살짝 졸음이 올 뻔 했는데, 강사님이 어쩌다 강사를 하게 되었는지의 스토리에서 감히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 정신이 없던 아이였다. 이랬다가 또 금방 저랬다가 싫증도 자주 느끼고 생각도 금방 바뀌어서 '줏대가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학교다닐 때 장래희망도 참 많이 바뀌었다(사실 바뀌었다기보다는 점점 늘어났다).
장래희망 후보중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던 직업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선생님이고 또 하나는 작가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 것도, 누군가를 잘 가르치는 것도 '누구보다 잘' 하는 편은 아니었겠지만 그냥 그게 좋았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대학에 들어가면서, 졸업하고 사회라는 곳에 나오면서 나의 꿈은 점점 사그라지는 듯 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내가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겠냐는 말이야.
그런데 농사짓는 일을, 시골에서의 삶을 열심히 하고 또 기록하고 또 사랑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글을 쓰는 사람,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쓰고 있고(세 번을 떨어지고 네 번만에 겨우 합격한 브런치 작가) 일년에 꽤 여러 차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도농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번 달에는 농진청에서 강의를 했고 다음 달에는 광주농업기술센터와 높은꿈자리유학센터(초중고 학생들)에서 강의를 하기로 되어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자꾸 학교나 어느 기관에 가서 강의를 하고 다니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니가 뭘 안다고, 농사에 대해서 남들 앞에서 제대로 말 할 수 없는 사람이 무슨 강의를 하냐고, 그러다가 니가 바보인 게(!) 탄로날까봐 걱정이라고 엄청나게 걱정을 했다.
그러다 몇 주 전, 농진청에서 주관하는 사례발표 대회에서 내가 진도농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큰 상까지 수상하는 모습을 보셨다. 엄마나 남동생은 내가 강의를 하는 모습을 한 번 이상은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처음이었다, 내가 누군가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뒤부터 아빠는 자꾸 내게 밭에 나오지 말라고 하신다. 나만 없으면 그렇게 내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다. 그루는 정말 똑똑해. 우리 딸은 정말정말 말을 잘 해. 고추밭에서 함께 쪼그려 작업을 하던 남동생도 거들었단다. 누나가 진도에서 그런 거(스토리텔링?) 제일 잘 해. 그리고 두 남자는 나를 제 2의 김미경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했나보더라.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들은 뒤 실제로 김미경 강사님을 만나보니 알겠다. 내가 왜 그렇게 애기때부터 작가를, 선생님을 하고 싶었는지. 작가나 선생님이라는 '명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동사', 누군가의 삶에서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발견해낸다는 '동사'가 중요한 것이었다.
강사님께서 태어날 때 'I am' 으로 시작해 죽을 때 까지 뒤에 온갖 동사와 부사와 형용사와 전치사를 붙이며 살아간다고 했다. '나는 우주최강 농부가족들과 어디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단단하고 멋진 마음을 가진 곽그루'다.
나이가 많아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었다고 단념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사님이 선물같은 말을 해주셨다. 30년 전의 '중위나이'는 29세였는데 작년의 중위나이는 46세라고 한다. 그러니까 30년 전에는 평균기대수명이 60도 되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90살까지는 거뜬히 산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자꾸 옛날 나이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다. 요즘 나이는 29세와 46세의 차이, 즉 17만큼을 뺀 것이 진짜 라이프스타일 나이라고 하셨다. 그럼 나는... 10대인데... 어쩐지, 아직도 내가 철이 없다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 갓 60대에 접어든 우리 아빠도 사실은 겨우 40대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갈수록 흰머리와 주름이 늘어나는 우리 아빠를 아주아주 오랫동안 청춘으로 모셔야지. 그리고 우리 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I am'을 정할 수 있게 내가 엄청 도와줘야지.
우리 동생은... 내가 자꾸 '기능적이지 못 해서 한심하게' 보지 말고 그 자체의 고유함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줘야지(이게 가장 어려운 것 같은데).
17세 그루루는 진짜 어른이 되는 그 날까지 멋지고 단단하게 준비를 해야지!
김미경 강사님 감사합니다. 좋은 자리 만들어주신 진도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