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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Dec 09. 2024

그래, 공장 짓지 말자

현명한 선택일까, 용감하지 못한 회피일까

며칠 째 TV와 인터넷이 정신없다. 21세기에 거짓말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내 머릿속도 혼란스럽다.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이고 절임배추의 여파와 함께 우리 모두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


그리하여 간만에 네 식구 모두 외식을 했다. 외식이라 해봤자 집 밖에서 먹는 국밥이지만, 그래도 정말 간만에 네명 모두 집 밖으로 나선 것이다.


엉망진창인 기분과 컨디션을 끌어올리려 나선 바깥행에서 나와 아빠의 투닥거림으로 결국에는 더 다운된 상태로 귀가했다. 투닥거린 이유라 하면.




김치 공장을 신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다투었다. 정확히 말하면, '뚜렷한 마케팅 대안도 없이 보여주기 식으로 무리하려는' 나를 못마땅히 여긴 아빠의 분노와 '잘 알지도 못 하면서'를 시전하는 나의 짜증이 만났다. 우리 집에서 가장 불같은 두 사람이 만나 괜히 엄마와 동생은 고래등에 낀  새우처럼 자글자글해졌다.


우리는 올해로 벌써 18년 째 배추를 절여 팔았다. 말이 18년이지, 내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일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것이다. 절임배추는 18년이지만, 할머니 때부터 지어온 고추농사의 역사는 더 오래 되었다.


고춧가루도, 절임배추도 긴 세월 팔다보니 자연스레 인지도(혹은 신뢰)가 쌓였다. 또 자연스레 '아예 김치로 보내주세요'하는 분들도 늘어났다.


공장 한 켠에서 열무도 버무렸고, 쪽파도 버무렸다. 우리의 제철김치들은 올 한 해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희망을 보았다. 지금까지 농사지으며 몸 버리고 헛돈 쓴 것을 생각하면 김치가 답이구나 싶었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문제는 지금 여건에서는 더 많은 김치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 없다보니, 늘 빠르게 마감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매번 완판되어 좋겠다고 하지만, 코딱지(?) 만큼 만들어놓고 빨리 팔리는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우리 손님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무슨 마감이 이렇게 빨리 돼요? 지금 장난해요?(10분만에 마감된 적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번 주문은 마감되었습니다. 다음 주문 때 연락주세요. 라는 말을 예약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다 두 배 정도 더 많이 하는 도돌이표가 되풀이되면서 안 되겠다 싶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던가. 이렇게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우리의 쪽배로는 파도를 제대로 타보기도 전에 전복될 것 같았다.




실은 공장을 더 확장해야겠다는 내 마음에 불을 지핀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청년농부라는 이유로 감사하게도 매우매우 저리의 융자를 쓸 수 있었다. 그 자금을 2025년까지 쓸 수 있었기에, 나는 더 없이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공장 한 켠에 작은 매장을 만들어서 퇴근시간마다 진도 손님들로 북적북적한 공간도 상상해보고, 진도를 대표하는 답례품으로 손잡이형 제철김치 패키지도 수 없이 노트에 그려보았다. 흐흐.


이제 건물만 지으면 되겠다. 싶던 나에게 아빠가 몇 번이고 질문을 했다. 어떻게 팔건데?




막상 큰 돈을 들여 공장을 지어놨는데, 갑자기 달마다 수 백만원의 고정비가 들어갈텐데, 지금보다 얼마나 더 팔아야 하며, 또 어떻게 팔 것인지 생각해본 적은 있느냐. 이렇게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자료를 만들어서 가족들 앞에서 브리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역시 우리 아빠는 사업을 하던 사람이라 나를 더 아프게 한다(IMF 때 내려와 농사꾼이 되었지만).


절임배추 알바(?)하며 간만에 용돈이 두둑해진 남동생 녀석이 국밥도 쏘고, 카페에서 국밥보다 비싼 커피와 빵까지 쐈는데, 그 분위기를 한 순간에 나와 아빠가 싸그리 망쳐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열등감 넘치는 내가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괜히 화를 내고 말았다. 난 참 모지리다. (그리고 아빠는 말을 지지리도 안 예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집에 돌아와 씩씩대는 나를 달래주는 엄마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와구와구 털어놓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결국 아빠의 말이 다 맞았다. 뼈를 때리는 아픈 말들이었지만 이걸 내가 잘 삼켜서 잘 소화시키면 훌륭한 약이 된다는 것도 사실 다 안다.


그래서 그루가 그루에게 물어보았다. 결국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믿음 덕분에.


Q. 공장을 확장하려는 이유가 뭐야?

A. 그래야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직원도 안정적으로 쓸 수 있잖아.


Q. 공장을 확장하는 비용을 충당할 만큼이라면 얼마나 더 팔아야 하는데?

A. 지금보다 두 배 이상 팔아야 해. 물론 더 많이 팔면 좋겠지만.


Q. 지금보다 두 배 이상도 일반 김치공장에 비하면 적은 양인데, 고작 그 정도 팔려고 수억원을 투자한다고? 너가 진짜 원하는게 뭐야?

A. 사실 그게 문제야. 이왕 투자해서 공간을 또 마련하는 거, 단순히 공장만 짓는게 너무 아까워. 매장도 있었으면 좋겠고, 교육장도 있었으면 좋겠어. 손님들이나 나도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걸 다 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이 안 돼.


Q. 꼭 그 자금을 써야 해?

A. 그래서 고민이야. 힘들게 통과한 정책자금이기도 하고, 0.5프로의 초저리와 넉넉한 상환기간 때문에 이 자금을 꼭 쓰고 싶은데, 당장 내년까지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급해져. 신중하게, 수치적으로 계산해야 하는데 자꾸 막연한 희망만 생각하게 돼.


등등등.


그래서 내린 결론은...!




2025년까지 써야 하는 그 자금을 꼭!! 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여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량을 발휘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만들 수 있는지, 얼마나 팔 수 있는지를 '수치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한 줄기' 희망이 아니라 정확한 계산이 떨어질 수 있을 정도의 유의미한 데이터와 역량을 쌓은 후에,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탄탄한 매출과 손님들을 쌓아놓고 난 후에 공장을 짓던, 교육장을 짓던 해도 늦지 않는다라는 결론!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나를 숨막히게 짓눌렀던 돌무더기가 스윽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도 몰랐는데, 희망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계획이 그 동안 내 목을 조르고 있었나보다.


물론, 지금 이렇게 새해의 가장 큰 프로젝트를 무산(아니, 1년 더 연기)시키는 게 최선일까, 용기없는 비겁한 후퇴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도망가는 것은 아니니까.


일년 뒤, 더 먼 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보는 것으로. 새해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하려고 하지 말고 '원씽'을 해보는 것으로!


공장아, 기다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윌리웡카의 초콜렛 공장 못지 않은 우리만의 스토리 가득 담은, 탄탄한 공간을 만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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