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김치를 시작한 이유
여유는 통장 잔고와 체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로, 여유로워지기 위해 잠시 여유를 잃고 사는 중이다.
진도에 다시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차이다. 그 10년 동안 우리는 참 많이도 싸웠다, 여유가 없어서.
처음에 내려왔을 때는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우리집의 기둥인 척 으스댔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기둥까지 뽑아먹는 식충이밖에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이 늘었으니 돈도 늘어야 하는데, 외려 늘어나는 것은 빚과 먹는 입 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나 무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몇 해 동안은 '젊은 여자 농부'라는 타이틀과 순전히 운 덕분에 장사를 꽤 잘 했다(고 착각했다).
나이는 먹어가고, 찐 농부들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면서 나의 캐릭터발도 떨어졌다. 장사는 점점 안 되었고, 돈은 여전히 못 벌고, 빚은 늘어갔다. 부모님과 서로 네탓이오 하며 언성을 높이는 횟수도 늘어갔다.
일을 안 해도 돈을 벌 수 있으면 중산층.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으면 서민.
일을 해도 돈을 까먹으면 하층민.
어디서 본 '계급도'인데, 우리는 철저히 하층민이었나보다. 부모님은 뼈가 빠지도록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을 했지만, 해가 지나도 보릿고개와 농협으로 돈 꾸러 다니는 굴레는 변함이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모님도 늙어가시고 나 역시 마냥 엄빠등에 빨대만 꼽고 살 수는 없었으니까.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나름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보았다.
농사만 지으면 돈이 안 되니까, 요즘(그때 당시에) 핫한 '체험'도 해보고. 송가인이네 쏠비치네 하면서 진도에 관광객이 많이 온다니까 오프라인 매장도 해보고. 농사는 지어야 하는데 요즘 대세라는 스마트팜도 임대받아보고. 면사무소 이름으로 북카페도 운영해보고.
그래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체험이네, 스마트팜이네 오히려 돈만 쓰고 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진짜 적자였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지옥이 무엇인지다.
희망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희망을 안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았는데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절망감. 그 시기가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고통스러운 NO여유의 시기였다.
이대로 부자에게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농담을 하던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누군가가 대신 김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리 농장의 메인은 고춧가루와 절임배추다. 여름에는 고춧가루를, 겨울에는 절임배추를 팔아 돈을 번다. 부모님 때부터 20년 가까이 했으니 대부분 단골과 그 단골의 지인들이 사주신다.
절임배추도 배추농사만 짓던 엄마에게 누군가 배추를 절여서 보내달라고 먼저 요청한 덕분에 시작했단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우리 고춧가루와 절임배추를 꾸준히 사주시는 어떤 분이 나이가 들어서, 허리가 아파서 김장을 못 하겠으니 대신 김치를 담궈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대신 김치를 담궈달라고 하신 분이 한 두 분이 아니었다. 원래 매년 듣는 요청이었지만 어떻게 김치까지 만들어, 하면서 거절했던 부탁인데. 지옥 한 가운데 있으니 마치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내려진 동아줄 같았다.
김치는 워낙 집집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딱 30분께만 '테스트'로 보내드려보았다. 김치를 받으신 분들은 전반적인 맛은 어떤지, 짠지, 매운지, 단지, 포장상태는 괜찮았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등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설문지를 꼼꼼하게 작성해서 보내주셨다.
그 손님들이 배추김치맛에 '확신'을 가져주셨고, 무한한 응원을 주신 덕분에 그 다음엔 쪽파김치, 열무김치, 석박지 등 제철김치를 쭈욱 쭈욱 만들어낼 수 있었다.
농사만 지을 때는 봄이 오는게 너무 무서웠다. 나올 데는 없는데 돈 들어갈 곳은 천지니까 말이다. 그런데 김치를 하면서 처음으로 농협에 빚을 내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절망에 빠진 엄마를 구해준 것은 절임배추였다.
절망에 빠진 나를 구해준 것은 제철김치였다.
아니, 우리를 구해준 것은 우리 손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