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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인 Apr 01. 2022

침묵하는 다수에게

페이스북 계정이 있다. 정치 견해를 넓힐 목적으로 만든 계정이다. 보수, 진보 진영의 유명 인사들을 팔로우한 내 피드에는 온통 정치 글 뿐이다.

좋아하는 노(老) 목사님이 있다. 얼마 전 그 분이 페이스북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 목적에 맞지 않아) 조금 망설였지만 그 분 계정을 팔로우했다. 덕분에 전쟁터 같던 내 피드에 한 줄기 꽃이 피어났다.

노 목사님은 주로 기독교 신앙이나 본인이 맡은 재단에 관련한 글을 올리신다. 그런데 어제는 여지껏과는 결이 다른 글을 올리셨다. 바로 최근 장애인 단체가 벌이는 지하철 불법 시위 관련 글이었다. 글에는 한 정치인을 언급하셨는데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누구나 그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장애인 단체가 시민을 볼모로 한 불법 시위를 벌인다며 비난했다. 목사님은 그 정치인이 맞는 말을 하는 것이며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용기있는 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지금껏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요구했고 기다렸으나 변한 것은 없었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젠 정말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불법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정치인이 간과했다고 말했다. 또 정치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막힌 삶을 물 흐르듯 잘 흐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며 정치인의 발언을 속상해하고 불안해하셨다.

장애인은 약자다. 약자의 외침은 무시해선 안 된다. 그 외침이 설령 불법을 동원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이다. 우리 사회가 약자의 외침에 반응하는 사회라면 훗날 내가 약자가 되어 소리쳤을 때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약자의 외침을 무시하는 사회라면 훗날 내가 약자가 되어 소리쳤을 때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 약자가 될 계획을 가지고 약자가 된 사람은 없다. 약자의 외침을 무시하는 까닭은 나는 약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에서 비롯한다. 아, 오만한 대한민국이여.

최근 이웃님과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홀로코스트는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은 어떻게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나치당은 합법 선거를 통해 독일의 제1당이 됐다. 그리고나서 불법과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했다. 이때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침묵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치당은 견제 세력이 없는 독재 정권이 되었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을 벌였다.

나치 정권의 권력이 서슬 퍼렇던 시절, 독일 루터교회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침묵하는 독일 국민들을 향해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글을 적었다. 약자의 외침을 불법으로 치부하고 비난하는 정치인을 그저 보고만 보고 침묵하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는 글이다.


​​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처음에 나치는 공산당원을 찾아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다음에 나치는 사회주의자들을 덮쳤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다음에 나치는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어느 날 나치는 유대인들을 끌고 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나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나치가 나에게 찾아왔을 때

나를 위해 나서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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