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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 Jun 17. 2019

진리는 여성이다?! 니체에게 진리란?

2부: 니체의 저서에 나타난 여성관


1부에서는 니체가 살았던 19세기의 시대정신과 니체의 비시대 정신에 대해 다루었다.

2부에서는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글 속에 녹아있는 그의 여성관을 살펴보겠다.


먼저, 니체의 사상과 가치관을 확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글이 저술되기까지 영향을 준 인물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바로,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다.


(좌)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니체에게 영감을 준 뮤즈


바그너와 니체의 애증의 이야기 

흔히들 바그너가 니체의 영향으로 철학적인 음악을 만들었다고 오해하는데 실상은 오히려 니체가 31살이나 많은 바그너를 너무 경외한 나머지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일례로, 니체는 오랜 기간 바그너의 음악을 완성시킨 고전적 바탕이 되는 ‘고대 희곡’과 ‘고전어 번역’ 등의 기반을 다져주었다.

하지만, 니체는 결국 음악으로는 바그너를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철학자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은 거의 바그너에게 바치는 책과 같았다.
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한 것은 음악가이면서 철학적  깊이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만, 단지 추종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갈등과 힘듦을 철학적 사유로(바그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인생의 다른 지평을 열어보인 것이다.

니체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음악적 소양에 미련을 가졌지만 어쩌면 이러한 미련과 노력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또 그 재능이 내면에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니체가 가진 고전어 능력과 고전문헌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자연스럽게 쌓여 또 하나의 산을 이룬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그너처럼 음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과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탐구할 수 있었을까.

선후관계에 상관없이 바그너로부터의 영향은 니체에게 절망희망을 모두 안겨주었다.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이 바그너라는 메인 재료로 요리되었다면 화룡점정을 장식한 킥은 쇼펜하우어다.

니체가 스스로 밝혔듯, 니체가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게 만든 장본인은 칸트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상한 쇼펜하우어였다.
니체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1818.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이 때문에 혹자는 쇼펜하우어의 여성관 역시 닮아 여성 혐오의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니체가 존경했던 바그너 역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에 갇혀 있기에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표상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구 중 하나로서 음악을 언급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은 표상의 세계에서 객체화된 육체를 넘어 내면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여겨졌고 바그너는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감명받고 심취함으로써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결국 그들 셋은 서로 통했다.
과거 지식인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보인 것을 보면 동시대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진리는 여성이다!


김정현 교수에 의하면, 니체는 형이상학의 근본 오류를 현대 자연과학적 진리관에서 발견한다. 그는 책의 서론에서 진리를 독단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여성'에 비유한다. 지금까지 미숙하게 파악했던 독단주의자들의 진리 이해가 빈사상태로 있으며, 그는 진리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진리란 여성이며, 우리는 진리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는 순수 의지에 의해 추구된 객관성이나 과학성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며, 그는 서양의 전통적 사유 문법을 해체하고자 한다. 그는 진리의 결정 불가능성을 존재를 드러내고 감추는 여성적 작용, 즉 존재의 놀이(유희)로 파악하며, 이를 디오니소스, 미궁, 바우보(Baubo), 생명, 여성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한다.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 모든 철학자가 독단주의자였을 경우, 그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때 가졌던 소름 끼칠 정도의 진지함과 서툴고 주제넘은 자신감이 바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졸렬하고 부적당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이 아닐까?                                                
- 『선악의 저편』  중에서                      
그들, 즉 잘못된 ‘자유정신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간단히 말해서 ‘평등하게 하는 자’들이다. 민주주의의 취미와 그 ‘근대사상’의 능변과 달필의 노예이고, 모두가 고독을 모르는 인간, 자기의 고독이 없는 무디고 얌전한 신출내기인 것이다. 그와는 반대 입장에 있는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이란 식물이 어디서, 또 어떻게 해서 가장 힘차게 자랐는가 하는 문제에 눈과 양심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그 성장은 항상 그와는 정반대의 조건에서 실현되었고, 그것을 위해서 인간 환경의 위험성은 무섭도록 커지고, 그의 창의력과 위장하는 힘 (그의 ‘정신)은 오랜 압박과 강제 속에서 겨우 정교하고 과감하게 발달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 말을 하건 안하건, 우리는 모든 근대의 이데올로기나 군중들의 소망과는 반대의 극에 존재한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한 여성이 학문에 대한 애호심을 가질 때, 그것은 보통 그녀에게 성적 결함이 숨겨져 있음을 말해준다. 불임이란 사실이 벌써 어느 정도 남성적 취미로 향하는 원인이 된다. 남성은 소위 ‘불임 동물’인 것이다.
여성은 독립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의 본질‘에 관해서 남성들을 계몽시키려 하고 있다.- 이 것이야 말로 유럽의 전체적인 추악화 가운데 가장 나쁜 진보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여성의 학문과 자기 폭로의 어리석은 시도가 무엇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 여자는 수줍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여자에게는 허다한 현학, 교사, 취미, 오만, 태만, 자부심이 숨겨져 있다. 여자는 진리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진리처럼 인연이 멀고, 싫고, 꺼릴 만한 것은 애당초 없다. 여자에게 최대의 기교는 거짓말이며, 최고의 관심사는 겉모습과 아름다움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근본문제를 잘못 생각해서 거기에 심각한 대립과 그들 사이에 영원히 적대시하는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남녀 간에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교육과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꾸는 자가 있다. 이 것이야 말로 천박한 두뇌의 전형적인 한 징후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이처럼 여자가 새로운 권리를 획득하고 00 씨가 되려고 하고 여성의 ‘진보’를 그 기치에 두고 있는 동안, 그 반대의 사실이 실현되고 있다.- 즉 여성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부인 해방’은 여성으로부터 요구되고 촉진되고 있는 한에 있어서도 여성다운 본능이 점점 약화되고 둔화되어 간다는 주목할 만한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회질서에서 여자는 노예적, 농노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분격해서 서투른 수법으로 그런 것들을 모아 들인다. 만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성 본능의 붕괴요 박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여성을 타락시키는 자가 있어 여성을 설득시켜 그처럼 여성미를 벗겨 버리고, 유럽의 ‘남성’, 유럽적 ‘남성미’가 앓고 있는 모든 어리석은 행동을 흉내 내게 한다. 여자가 존경심을, 또 때로는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그녀이며, 이 것은 남자의 것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겉보기에는 독자적으로 성립한 것 같은 모든 논리와 의견도 어떤 가치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한 종류의 생명 보존을 위한 생리적 요구가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확정을 불확정보다 가치가 있다고 보고 가상을 진실보다 가치가 없다고 보는 평가는, 그것이 아무리 우리에게 중대한 규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저 구실로서의 평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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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생리 심리학 연구자는 마음속에 무의식적인 저항과 싸워야만 한다. 모든 선의 충동을 악의 충동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누가 증오, 질투, 탐욕, 지배욕 등을 생명의 필수적인 감정이라 보고 그것이 생명의 전 영역에서 근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생명이 상승되어야 할 경우에는 이 것 역시 상승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식의 비판을 하는 것 때문에 마치 뱃멀미를 앓듯 괴로움을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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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진리와 성실과 사심 없는 행위에 가치가 부여되더라도 가상·허위에 대한 의지. 사욕. 욕망에 보다 높고, 보다 근본적인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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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눈에 안 보이는 힘에 사로잡혀 늘 똑같은 궤도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은 비판적, 또는 체계적 의지로써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기는 해도 그들 내부의 무언가가 항상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즉 타고난 개념의 체계와 유사성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자꾸 돌아간다. 사실 그들의 사고는 발견이 아니라 오히려 재인식이고 회상이다. 그들의 개념은 일찍이 거기서 생겨난 태곳적 영혼의 총체적인 세대로 복귀하는 것이며 귀향하는 것이다.
•••
단테와 괴테가 여성에 대해 믿고 있던 것-단테는 “그녀는 위로부터 지킨다. 나는 그 안에 있노라.”라고 노래했고, 괴테는 이 것을 번역하기를 “영원한 여성은 우리를 높은 데로 인도하도다.”-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고귀한 여성은 이 믿음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 녀들은 바로 그런 것을 영원한 남성적인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  『선악의 저편』  중에서


니체의 저서를 통한 이해


원전 속 여성에 관한 내용을 통해 니체의 사고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생각도 구축해보길 바란다.       



 ① 이 사람을 보라                                 


1908.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Wie man wird, was man ist


여성들은 조상들이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리학적 병증과 마주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등권의 요구이다. 이 동등을 위한 투쟁은 가히 병적 징후에 가깝다. 나를 미쳤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도 이를 시인했다.
이 같은 투쟁에 뛰어든 여성들은 양성 간의 싸움에서 우선권이 자신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대체 왜 여성들은 남자의 사랑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 권리마저 찬탈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여성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녀들은 어린아이가 필요하다. 즉, 그녀들에겐 임신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여성에게 남자란 항상 수단에 불과했다. 거리에 나부끼는 저 ‘여성 해방’의 목소리, 이것은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여성들의 분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에 필요한 남자를 얻지 못했다는 상실감의 표현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들의 ‘수단’을 강탈한 같은 여성들에 대한 증오이다.
여성 해방론자들이 적으로 상정한 남성은 그저 수단일 뿐이며, 전술에 불과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이며, 말이 통하는 고급 창녀이며, 이상주의자라고 내세움으로써 동시대의 같은 여성들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고등 교육과 양복바지, 그리고 참정권은 여성에 대한 여성의 투쟁에 필요한 무기일 뿐이지 요구가 아니다. 따라서 남자로부터 해방된 여성들은 여성적인 세계마저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② 선악의 저편-미래의 철학


1886.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전주곡》


최악의 진보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이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이 많이 숨어 있다.ㅡ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ㅡ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ㅡ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ㅡ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선악의 저편』 중에서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만일 어떤 여성이 바로 롤랑 Roland 부인이나 드 스탈 부인 또는 조르주 상드 George Sand를 끌어들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ㅡ 악취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라도 ㅡ 이는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위에 언명된 사람들은 세 명의 우스꽝스러운 여성 자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해방과 여성의 자기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증이 될 뿐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마디 말                                 

부엌에서의 어리석음. 요리사로서의 여성. 가족과 가장의 섭생을 배려하는 데 끔찍할 정도의 무신경함! 여성은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성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수천 년 간 요리사로 활동을 해왔으니 최대의 생리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의술도 획득했어야 할 것이다! 서투른 요리사로 인해 ㅡ 부엌에서 이성이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은 가장 오랫동안 저지되었고, 가장 심하게 해를 입어왔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더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마디 말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이제까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어떤 높은 곳에서 그들에게 잘못 내려온 새처럼 취급되어왔다 : 좀 더 섬세하고 상처 받기 쉬우며 거칠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고 영혼이 넘치는 어떤 것으로, ㅡ 그러나 달아나지 않도록 가두어두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 『선악의 저편』  중에서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어느 시대에도 우리 시대만큼 나약한 성이 남성에게 이렇게 존경을 받은 적은 없다. 이것은 노인에 대한 불경(不敬)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경향과 근본 취향에 속하는 것이다 ㅡ : 이러한 존경이 바로 다시 악용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은 원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마침내 저 당연히 치러지는 존경을 거의 모욕으로 느끼고, 그리하여 권리를 위한 투쟁, 아니 실로 투쟁 자체를 선호하고자 한다 : 어쨌든 여성은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덧붙인다면, 여성은 또한 취향도 잃어가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고 있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잊는' 여성은 자신의 가장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더 명확하게 말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성이 크게 육성되지 않게 될 때, 여성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퇴화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여성이 이와 같이 새로운 권리를 자기 것으로 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며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반대의 일이 실현된다 : 즉 여성이 퇴보해가는 것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온갖 종류의 음악 가운데 병적이고 가장 위험한 음악으로 (우리 독일의 최신 음악으로) 여성의 신경을 망쳐놓고 그녀들을 매일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여성들을 일반적으로 더욱 '교화'하려고 하며, 이른바 '나약한 성'을 문화를 통해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 마치 인간의 '교화'와 허약화 ㅡ 즉 의지력을 허약하게 하는 것, 분열시키는 것, 병약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서로 보조를 같이했다는 사실과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들(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그러했는데)은 바로 자신의 의지력 덕분에 ㅡ 학교 선생들의 덕택이 아니라 ㅡ 남성들을 능가하는 자신의 힘과 우월함을 자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능한 한 절실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여성에게서 존경과 때로는 공포마저 일으키는 것, 그것은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그녀의 자연이며, 이러한 것으로는 진정하게 맹수같이 교활한 유연함과, 장갑 아래 숨겨진 호랑이 발톱, 이기주의의 단순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속성과 내적인 야성, 욕망과 덕성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 폭넓은 것, 방황하는 것이 있다 ······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고양이인 '여성'에게 동정을 갖게 하는 것은, 여성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하고 상처 받기 쉬우며 사랑이 필요하고 환멸을 느끼도록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남성은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여성 앞에 서 있었으며 언제나 한 발은 이미 황홀해하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비극에 넣고 있었다 ㅡ. 뭐라고? 이것으로 이제 끝내려 한다고? 여성의 매력 상실이 일어나려고 한다고? 여성의 무료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오 유럽이여! 유럽이여! 너에게는 언제나 가장 매력 있었으며 너를 거듭 위험에 빠뜨리려는 뿔 달린 동물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의 낡은 우화가 다시 한번 '역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다시 한번 엄청난 어리석음이 너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으며, 너를 운반해 갈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음 아래에는 어떤 신도 숨어 있지 않다. 그렇다! 단 하나의 '이념', '현대적 이념' 만이 숨어 있을 뿐이다!
- 『선악의 저편』  중에서


  ③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188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그래서 여자들에게 정치와 학문의 개별적인 부분들(예를 들면 역사학)이 맡겨진다면, 작지 않은 위험이 생긴다. 왜냐하면 학문이 뭔지 정말 안다고 하는 여자보다 무엇이 더 낯설겠는가?
여성의 질풍노도기- 유럽의 몇몇 문명국에서는 몇 백 년 동안 교육에 의해, 여성들에게서 원하는 모든 것을, 남성까지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녀들은 그러한 영향 아래 언젠가는 남성의 온갖 미덕과 장점을 몸에 지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약점과 악덕도 동시에 덤으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에 태곳적부터 그녀들에게 주어진 생일 선물인 여성 특유의 우매함과 부정함이 모든 암시적이고 배워 익힌 것 위에서 여전히 우세를 자랑할 그런 중간 상태를 어떻게 우리는 견딜 것인가?....... 여성들이 자기들의 최대의 힘을 풍습 속에 갖고 있었다면 풍습을 폐기해 버린 뒤에 그와 비슷한 힘의 충만함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들은 어디로 손을 뻗쳐야 하는 것일까?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어머니로부터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얻은 하나의 여성상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 일반을 존경하느냐, 경멸하느냐, 대체로 무관심하느냐는 이것에 의해 결정된다.


남성의 병

자기 경멸이라는 남성의 병에는 영리한 여성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효험이 있다.


여성적인 지성

여성들의 지성은 정신의 완전한 제어, 침착, 그리고 모든 장점의 이용으로 나타난다. 그녀들은 그러한 지성을 자신들의 근본 특징으로 아이들에게도 전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의지라는 더욱 어두운 배경을 거기에 추가한다. 아버지의 영향은 새로운 생명을 연주해야 할 리듬과 하모니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 생명의 멜로디는 여성에게서 나온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도 남성들은 무엇보다 먼저 깊이 있고 감정이 풍부한 자를 구하는 반면 여성들은 영리한, 침착한, 훌륭한 자를 구하는 것에서 결국, 남성은 이상화된 남성을, 여자는 이상화된 여성을, 즉 자신의 특징의 보충이 아니라 완성을 바란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완전한 여성

완전한 여성은 남성보다도 더 고귀한 인간 유형이다. 또한 아주 드문 유형이다. 동물의 자연과학은 이 명제를 사실로 여기게 하는 하나의 자료를 제공한다.


④ 즐거운 학문                                 


1890년대 이후 니체 전집 수록작. 《즐거운 학문》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그러므로 아마도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금실로 짠 너울이 삶 위에 놓여 있다. 미래를 예고하면서, 저항하고, 부끄러워하며, 조롱하는가 하면, 동정하고, 유혹하면서. 그렇다. 삶은 한 여자이다.
- 『즐거운 학문』 중에서

  

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그리고 여자는 복종해야 하고 그녀의 표면을 위해 깊이를 발견해야 한다. 여자의 정서는 표면이다. 얕은 물 위에 떠 있는, 움직이기 쉬운 폭풍우 같은 막. 남자의 정서는 그러나 깊어서, 그의 흐름은 지하의 동굴에서 졸졸 흐른다. 여자는 그의 힘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하지만, 파악하지는 못한다.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니체에 대한 학자들의 소고


『선악의 저편』의 현대적 의미

  앞의 김정현 교수의 이야기처럼,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는 진리/여성의 문제, 문체, 영혼, 언어 문법과 사유 문법, 심리학으로서의 철학, 자유정신, 자기 해방, 종교적 신경증, 인간 심리의 통찰, 도덕의 자연사, 꿈의 해석, 민주주의, 지성인 담론, 큰 정치, 쾌락과 고통의 문제, 문화와 자연성, 반유대주의 비판, 현대 이념,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고귀한 인간 등 실로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이 책은 현대철학에서 수많은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사유의 시발점 역시 『선악의 저편』의 서문에서 시작된다. 진리와 여성을 비유하는 니체의 문제의식은 데리다의 존재론적 담론이나 코프만의 정신분석학적 담론으로 확장된다. 진리와 사유, 세계 이해와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는 니체의 문제의식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며, 다원주의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제기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사유 문법을 열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나 심층적인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은 심리학적 통찰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니체적 통찰은 현대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융의 분석심리학,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랑크의 의지 심리학 등 심층심리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았고, 또한 이러한 이론적 지평 위에서 게슈탈트 치료, 인본주의 심리치료, 실존주의 심리치료, 로고테라피 등 현대의 수많은 심리치료의 이론들이 개발된 것이다.      


니체는 여성 혐오주의자인가?


니체를 반여성주의자로서만 단정하여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자 심각한 오독일 수 있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의 철학 전반에서 여성에 대한 언급들만 도려내는 태도는 니체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키워드야 말로 니체 철학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는 주요한 핵심이다.      


근대의 민주주의는 인간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제1세대와 1960년대 이후 제2세대 페미니즘은 제도적·정치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운동의 역효과는 고유한 성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고, 여성성에 기반하지 않은 남성성과의 인위적인 동일화로 인해 여성만이 가진 내밀한 고유성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니체는 페미니즘이 지닌 이러한 단점을 근대 민주주의가 초래한 병폐로 보고 이것을 비판한다. 양성의 동일한 사회적 활동이 양성의 무화로 퇴락하는 것을 니체는 경계한다. 성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생존을 그치게 되고, 긴장감이 부재하는 양성의 관계는 위버멘쉬의 탄생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의 평등을 위해 니체를 재평가한다. 생물학적 양성의 존속 이유는 2세의 출산이다. 여성성과 여성의 몸은 2세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성성은 늘 생명을 의식하며, 그러므로 미래를 의식하는 성향이다. 이에 비해 남성성은 2세의 출산에 관한 한 보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여성성이 지니는 고유한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이를 인위적인 남성성과의 동일화 운동으로 없애려 한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를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단순히 여성 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여성은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 구조에서 여성들의 고유성들은 쉽게 파괴되고 무시되곤 한다.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반인간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단순화된 평등론이 함의하는 위험을 이미 니체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경고가 현대 사회의 여성 운동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 <니체와 페미니즘>(김정현, 2006) 중에서


‘3부. 20세기 시대정신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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