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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남매아빠 Oct 12. 2023

나의 북유럽 사진 여행기 #1

아내의 그릇


우리 부부에게 첫 아이가 생겼을 때 내손으로 가족사진을 기록하고 싶었다.

큰 맘먹고 구입한 카메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담는 일 외에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가 화두가 되자 혼란스러워졌다. 유튜브를 뒤지고 사진 서적을 사다 봤지만 사용법에 대한 내용 외에 궁금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온라인 세미나 한 편으로 내 사진생활은 격변하게 됐다. S 사진가의 강의가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나도 저렇게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것도 처음이다. 이 사람은 진짜였다! 학창 시절 그림을 그만둔 이후에 오래도록 사라졌던 배움에 대한 갈망은 그의 오프라인 사진강의 수강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골목길, 비, 안개, 블루아워 등 그간 내 사진과 무관해 보이던 시공간에 대한 경험들은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 사진의 비경이 숨어있음을 알게 해 줬다.

사진의 어려움과 재미를 동시에 체감하던 어느 날, 북유럽 풍경사진 세미나 일정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로 인해 3년간 추진하지 못했던 계획으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의 북유럽 국가들을 보름동안 여행하며 오롯이 사진만 담는 여정이었다. 내게 있어 유럽은 티브이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며 평생 마주할 일 없을 상상의 장소였다. 마땅한 이유를 찾기 힘들지만,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상향, 죽어서도 갈 수 없을 곳이었다. 그런 곳에 대장과 함께하는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일정이라니! 세 아이의 아빠이자 외벌이 가장의 현실 속에서도 호기심과 설렘이 일었다. 집안일로 휴가를 낸 어느 날, 볼일을 마치고 아내와 가까운 쇼핑몰에서 점심을 했다. 아이들 이야기로 대화를 하던 중, 이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의도나 기대가 깃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의 한마디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녀와.”

“... 응?”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어? 다녀와.”

“... 자기 어디 아파?”

“일정 정해지면 알려줘. 보내줄 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다녀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돈도 많이 들고, 신청한다고 해서 내가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 말을 하고 나니 궁색해졌다. 어떤 일을 하기 앞서 온갖 핑계들로 주저하는 안 좋은 버릇이 그대로 나온 탓이다. 꼭 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잔뜩 찾는 이상하고 고약한 버릇이다.

“유럽에 그 정도 기간을 가는데 돈이 적게 들겠어? 당연히 많이 들지. 그리고 20년 일하면서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자기 그 정도 자격 있어, 그러니 다녀와.”

연애를 포함해서 아내를 만난 지 25년이나 됐건만 아내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가끔 잊고 산다. 늘 그래왔다. 잡스러운 온갖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에는 누구보다 대범하고 명쾌하게 결론 낸다. 부수적인 문제는 나중에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문득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생각났다. 남일 이야기하듯 "동경"으로 포장했을지언정 북유럽 여행이 내게 갖는 의미가 뭔지 나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순식간에 나의 북유럽행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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