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다음은 테토와 에겐:
이름표에 집착하는 우리들

우리는 왜 계속해서 새로운 이름을 찾는가

by ONIGIRI
목차
1. MBTI 다음은 호르몬
2. 정체성, 생존 전략이 되다
3. 불안한 자아, 메타 인지로 버텨내기
4. 일본, 중국, 한국
5. 끝나지 않을 정체성 테스트

1. MBTI 다음은 호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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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MBTI의 열풍이 뜨거웠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MBTI가 뭐예요?”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MBTI는 대화를 시작하는 코드이자,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는 도구로서 완벽한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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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새로운 코드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테토’‘에겐’, 호르몬을 기반으로 한 사람 유형 테스트입니다.

테토는 테스토스테론형, 에겐은 에스트로겐형.

성격, 취향, 연애 스타일 등 모두 이 두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왜 MBTI를 지나 호르몬으로 넘어오게 된 걸까요?

MBTI는 심리적인 성향을 감각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트렌드는 조금 더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설명을 향합니다.

호르몬, 뇌 유형, 유전자 같은 키워드는 사람들에게 더 객관적인 근거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MZ세대는 자신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을 원합니다.

“내가 왜 이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생물학적’ 이유는 가장 간단하고 믿음직한 답이 되어 줍니다.


어쩌면 이는, 심리와 정체성이라는 불확실한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제 ‘객관적인 자기 해석’을 갈망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사람이 16가지 MBTI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요.

하물며 두 가지 호르몬만으로 인간의 내면과 성격, 세계를 분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자신을 구분짓고 이름 붙이는 일을 추구하는 걸까요?


2. 정체성, 생존 전략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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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국 사회의 고맥락(high-context) 문화를 떠올려 봅시다.

말보다 분위기나 눈치를 먼저 읽고, 맥락을 이해해야 관계에 끼어들 수 있는 한국 사회.

이런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MBTI, 성격 테스트, 그리고 이제는 호르몬 테스트까지 꺼내며 대화의 코드를 만듭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동시에 나 자신을 효율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욕망은 성과 중심 사회 구조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20~30대는 선택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설명을 준비해두어야

면접장에서도, 데이트 자리에서도 불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더 이상 내면의 고유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회적 생존을 위한 포지셔닝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빠르고 간편한 정보를 선호하는 디지털 소비 문화가 이 흐름에 불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긴 설명보다, 한 줄 요약을 택합니다.

“테토녀”, “에겐남”, “INFP 불안형” 같은 표현은

이미지와 감정을 단번에 전달하는 일종의 자기소개서가 됩니다.

짧고 직관적인 표현은 디지털 환경에서 빠르게 자신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3. 불안한 자아, 메타 인지로 버텨내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메타 인지(metacognition)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MZ세대는 정보도 많고, 감정도 넘치고, 자기표현은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 지금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자신을 관찰하고 묻습니다.

“나는 왜 이런 말투를 쓸까?”, “왜 이런 옷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것은 단순한 테스트 놀이가 아닙니다.

자기 관찰을 유희로 전환한 메타 인지적 놀이입니다.

자신을 진단하고, 해석하고, 콘텐츠처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이죠.


게다가 한국의 MZ세대는 특히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더 크게 안고 있습니다.

성과로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사회, SNS 속 끝없는 비교,

전통적 공동체의 붕괴, 보상 없는 노력의 반복.

이런 구조 속에서 자아는 더 이상 내면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통해 확인되는, 불안정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나를 설명하고 싶고’, ‘소속되고 싶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뒤섞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MBTI도, 에겐-테토도 그 모든 테스트는

불안정한 자아를 간신히 붙잡기 위한 작은 이름표일지도 모릅니다.


4. 일본, 중국, 한국


그렇다면 한국만 이런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일본은 표현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SNS보다는 오프라인 공동체 속에서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이름 붙이기’보다는 ‘함께하기’에 가깝고,

취미 활동, 팬 문화, 서클 활동 등 일상 속 반복되는 역할 속에서 자아를 형성해 나갑니다.

maxresdefault.jpg 유튜브,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중국은 ‘탕핑(躺平, 드러눕기)’이나 ‘네이쥔(内卷, 내재적 경쟁)’ 같은 단어를 통해

자신을 유형화하기보다는 시대적 피로감에 공감하는 집단적 감정을 표현합니다.

개인의 정체성보다 구조적 압박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자기 위치를 정의합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을 덧붙입니다.

에겐남, 테토녀, INFJ 회피형, ENFP 불안형…

우리는 나를 어떻게든 정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5. 끝나지 않을 정체성 테스트


테토의 성향도, 에겐의 기질도 모두 우리 안에 공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이 '나를 단순화하기 위한 도구'일 수는 있어도

'나 자체'를 대변하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국, 우리가 집착하는 이 모든 테스트는

나라는 미지를 향한 작은 나침반일지도 모릅니다.

꼭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길.

다만, 오늘의 나는 이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테스트 열풍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엔 또 어떤 요소가 등장해 우리를 다시 한번 구분지을까요?

호르몬, 뇌 유형, 감정 곡선, 취향 그래프… 형태는 바뀌어도 그 밑바탕엔 늘 같은 욕망이 흐릅니다.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고, 어딘가에 속해 있고 싶고, 이 복잡한 세계 속 나만의 설명서를 갖고 싶다는 바람.

그 욕망이 트렌드를 만들고, 이름표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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