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넷 졸업생 이야기
철만이 꽃말(9기, 함경북도 회령).. 아직은 살만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혼자인 것이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면 TV를 항상 켜놓고 나왔다. 그래서인지 서둘러 사랑했고 또래 친구들보다 빨리 가족을 만들었다. 셋넷에서 하라는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면서 연애를 했다. 2014년 가을 치악산에 단풍이 물들었을 때 산기슭에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결혼식을 했다. 어느덧 일곱 살 딸아이와 여섯 살 아들을 지키는 아빠이자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살이 13년이 지났건만 자본주의를 알면 알수록 무섭다. 머리로만 알던 자본주의를 피부로 경험하니 냉정하고 살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났던 북조선은 개인의 삶을 강제했지만, 한국은 스스로 알아서 자기를 다그치고 채찍질하도록 해서 매 순간 긴장하게 만든다. 북한보다 살기 좋은 곳인데 뭐가 힘드냐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되물을 때마다 할 말을 잃고 답답한 심정이다. 경우를 따지고 일마다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만만했던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만 같다. 문득문득 한 마리의 경주마로 변해가는 것 같다. 앞만 볼 수 있게 눈 주위를 가리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기장을 내달리고 있는 게 내 삶인 것 같다. 내 앞에서 내달리는 말들을 보며 저 말들은 지치지도 않고 언제나 나를 앞질러 가겠지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면, 쓸데없는 생각들을 접고 다시 미친 듯이 달리게 된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면서도 왜 힘든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멈추는 법을 잊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한다.
매 순간 긴장하고 살면서도 이제는 스승인지 부모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망채샘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강제로라도 잠시 멈추게 해 주어서 안도한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금 쉬어 가도 된다고,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위로하고 지지해 주신다. 지나온 길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신다.
가끔 이유 없이 샘께 찾아가 힘들다고 펑펑 울다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무 말도 안 하고 같이 울어 주신다. 그러다 보면 초조함으로 가득하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던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경쟁과 생존에 쫓기던 내가 보인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을 향해 가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할 때마다 아직은 살만하다.
* 백 송이 꽃에는 백 가지 꽃말이 있다.. 장 뤽 고다르가 한 말.
* 9월 출간 예정인 셋넷 학교 두 번째 이야기 단행본에 실릴 글.
* 2012년 창작극(홍대 소극장) 공연을 마친 뒤.. 꽃을 들고 있는 주인공 배우가 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