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훈(셋넷 수호천사, 평론가)
셋넷학교는 추방된 학교였다.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밖으로 내몰린, 북한으로부터 또 교회로부터 길 위로 내몰린. 길 위에서 상처받은 자 길 위에서 나으리라. 셋넷은 길을 교과서로 삼았다. 셋넷학교의 꽃은 여행이다. 사실 여행은 그 자체로 학교다. 길잡이 늑대는 여행을 봉사활동과 묶었다. 다른 탈북학교였으면 봉사를 받기만 할 아이들이 ‘감히’ 봉사를 해야 하는 버거운 짐을 지고 여행을 떠났다. 학교를 세상과 다른 수도원으로 만드는 대신에 세상과 닮은 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한 청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 책은 편파적 ‘늑대’의 시선으로 여행을 바라본다. 동시에 그 자신을 바라본다. 이 늑대는 여행을 통해 경건해진다. 자기가 버린 사람들, 자기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아빠가 미안하구나. 니들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다. 용서를 빈다. 제 욕심에 갇혀 몸부림치던 한 남자와 여자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길 바란다.) TV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고백하는 자들은 경건하다. 하지만 늑대가 경건해졌다고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의 고백이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전략이라면, 늑대는 고백은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는다.
잘 알겠지만 늑대의 길은 험난하다. 이 여행은 스스로 내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그 교육적 의미를 오히려 상실한다. 저자는 먼 이국땅에서 만나야 할 셋넷의 졸업생들을 끝내 만나지 못한다. (미선이와 경민이를 만나지 못한 꼰대 나그네는 아쉬움으로 자꾸만 뒤돌아보는데, 오슬로역을 떠나는 기차는 망설임이 없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는 ‘하나투어’ 같은 패키지여행의 회사명일 뿐이다. 남북의 차이와 다름으로 결국 여행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우린 하나로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각자였다. 손말라 마을 봉사활동 작업에서 생긴 충돌과 상처들로 뿔뿔이 흩어진 채 남인도를 떠다녔다.)
여행의 길 위에서 남북의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었다면, 장군님 영도의 덕분이거나, 아니면 주님의 은총이었으리라. 그랬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멜로드라마 거나 종교적 멜로다. 셋넷의 여행은 좌절과 패배의 계기들을 잔뜩 품고 나선 행군이다. 이 여행은 주인 품에 안겨 세상을 구경하는 패키지여행이 아니고 스스로 먹이를 구하러 다녀야 하는 늑대의 길이다. 길잡이만 늑대가 아니다. 아버지(상징적인 의미)의 집에서 도망친 셋넷들은 이미 늑대다. 셋넷들 모두 늑대다.
셋넷은 아이들을 ‘훌륭하고’(개는 훌륭하다) ‘달라진’ (우리 개가 달라졌어요)’ 개로 키우고자 하지 않았다. 저들을 여전히 늑대로 남기고 싶어 했다. 장군님이라는 큰 기표에서 도망친 아이들을 주님이라는 또 다른 큰 기표로 밀어 넣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도록 아이들을 길로 내몰았다. 길을 찾는 모든 행위는 구도의 길이다. 교회로부터 내쳐진 그(저자)가 구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놓지 않는다.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 없다. 피조물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그 믿음 속에서 그(저자)는 때로 좌절하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카뮈의 ‘끝없는 패배’로 기뻐한다. 삶은 이기는 게 아니라 패배다. 끝없는 패배다.’ 그는 와이파이 신에게 사로잡힌 남한 대학생들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3주 동안 핸드폰을 쓰지 않고’,(기특해라),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고 살아가는 베트남의 아들과 딸들에게 인간의 얼굴로 참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