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 Feb 25. 2024

30대 백수에게 부모가 건네는 것들

'가장답게' 사는 삶.


저녁을 사주고 싶다던 아빠가 며칠 전 30만 원을 새해 용돈으로 줬다. 사회에 나온 이후에 돈을 대가 없이 받아본 적 있었던가. 엄마는 내가 한 심부름에 10만 원을 건넸다. 기분이 이상했다. 부모는 직업이 없는 자식이 가엾구나. 미안해졌다.


30대 중반에 돌연하게 회사를 관두겠다 결심했을 때. 보수적으로 착실하게 평생을 살아온 엄마 아빠의 반응은 놀랍게도 똑같았다. "그래, 알겠다"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이어지는 업무 속에서 육체와 정신이 피로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내가 그만두겠다 선언했을 땐 자신의 업무적 이해관계 속에 섞인 이들을 제외한 나의 진짜 동료와 진짜 친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살다가 정말이지 큰 병에 걸릴 것 같다"는 나의 호소는 진심이었으니깐. 대동단결 나의 퇴사를 묵묵하게 응원했던 부모의 마음에도 시간이 지나자 불안함이 깃들었다. "아직 자리 없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실하게 잘 지내"


갑자기 생긴 목돈으로 대출을 갚는 대신 회사를 관두고 미뤄뒀던 병원 투어를 다녔다. 건강검진은 물론 아픈 몸의 구석구석을 정밀하게 검사하고 긴 시간 미뤄두었던 잠을 잤다. 영원히 지워지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완전하게 소진되어 버린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채우느라 꽤나 바쁘게 보냈고 비로소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봄이 오고 있다. 텅 빈 마음이 아주 보통의 일상으로 찰랑이자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예뻐졌어요!" 피로와 스트레스로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눈 주위의 근육들이 쭉 빠지면서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면서 부모가 다달이 내어주던 보험료부터 교통비, 핸드폰 요금까지 차근차근 가져왔다. 혼자 살기를 선언하고 가장으로서 스스로를 금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은 당연했다. 치열하게 파고들어 만든 커리어를 뚝 끊어내고 계획 없이 회사 밖을 뛰쳐나온 뒤에도 부모에게 기댈 생각은 없었다. 가장 먼저 방앗간처럼 드나들던 쇼핑 앱을 끊었다. 장 보는 횟수도 확 줄였다. 그럼에도 빈 시간을 빈 시간으로 둘 생각 역시 없다. 여행을 떠날 때, 문화생활을 할 때, 무엇이든 배울 때 아낌없이 쓰고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로 하루를 오롯하게 내 것으로 두는 일을 선택했고 이 시간을 꽤 기쁘게 보내는 중이다.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가여운 사람을 자청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언제고 일상을 풍요로운 영감으로 채우는 게 불가능해진다면 묻고 따지지 않고 '가장답게' 사회로 돌아갈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취향을 가진 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