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과 마크 로스코 작품이 페이스 갤러리에서 만났다. 이우환이 직접 큐레이팅에 참여해 로스코의 가족들이 제안한 작품 중에 6점을 골랐고, 자신의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전시는 크게 2층과 3층으로 나누어졌는데, 비교적 작은 공간인 2층에 로스코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직전 사진을 찍지 말라는 안내를 받은 후 우측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려 마주한 거대한 그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벽에는 검은색과 회색으로 구성된 추상 회화 한 점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묵직하게 덮어진 거대한 색과 면에 완벽하게 압도된 채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걸린 그림을 모두 보고 다시 같은 그림 앞에 섰을 때 마찬가지였다. 안내하는 이가 보고 있지 않았다면 캔버스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이상하다. 1년에 단 한 번도 스케치북 앞에 서서 무엇을 그릴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거대한 감정을 선사한다. 언제 마지막으로 붓과 물감을 써봤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상담사가 나더러 '소용돌이 같은 감정을 네모난 박스에 넣어 꽉 붙들고 산다'라고 말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하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그는 내게 '감정 접촉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오랜 시간 살아가며 감정을 다뤄왔던 방식과 닿아있다고 덧붙였다. 감정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입이 말랐다. J는 내게 '즐거웠던 경험은 신나게 공유하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일은 뉴스 보도처럼 말하며 말을 아끼는 편인 것 같다'고 했다. 모두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어쩐지 그림 앞에만 서면 고여있던 감정이 밖으로 삐져나온다. 아무런 연고 없는 무해한 작품 앞에서 마음 추스를 틈 없이 무장해제가 된다. 때로는 행복함과 설렘이 뿜어져 나오고, 때론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말 못 하는 그림을 붙잡고 웃고 우는 일은 이따금 아름답게까지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입 속에 맴도는 마음을 붙잡을 때마다 다시 갈 것이다. 나를 붙드는 아무 그림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