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피부, 건강한 삶의 본질을 탐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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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잘 쓰지 않는 제가 오랫동안 즐겨 쓰는 향수가 있습니다. 호주에서 시작된 코스메틱 브랜드 이솝 Aesop의 테싯 Tacit입니다. 아름다움을 일부러 뽐내는 것 같은 인공적인 향을 좋아하지 않는데, 테싯은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향이라 오래 써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마시는 상쾌한 흙내음과 사찰에서 태우는 은은한 향 냄새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향이었어요.
향수로 이솝에 입문한 저는 서양에서 만들었지만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브랜드에 천천히 스며들었습니다. 브랜드의 모든 요소가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데 존재감이 뚜렷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제거해서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였어요. 이솝이 쓰는 언어에서도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브랜드 문화와 철학을 전하기 위해 제품, 패키지, 홈페이지 등에 새겨 놓은 행동가와 예술가의 격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One eye sees, the other feels. 한쪽 눈은 보고, 다른 쪽 눈은 느낀다.'
무심코 버리기 쉬운 제품 패키지에서 이 문구를 발견했을 때, 선물 받은 이솝 제품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파울 클레가 현대 추상 미술의 시조라 불리는 예술가인줄은 몰랐지만,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거든요.
홈페이지 곳곳에서도 '독창성이 지닌 가치는 색다름이 아니라 진정성이다'와 같은 격언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추석 선물을 포장하는 보자기에는 다산 정약용의 '비범함은 무수한 평범함이 쌓인 결과다.'라는 격언을 새겨 넣었죠. 풍성한 수확의 결실을 나누는 추석에, 그동안 삶에서 쌓아온 인고의 시간을 돌아본다는 의미를 담은 겁니다.
빛나는 밤하늘처럼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세 가지 아로마틱 캔들에는 고대 천문학자 프톨레미, 아그니스, 칼리퍼스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과학적 탐구에 경의를 표하는 격언을 새겼습니다.
“No age is too early or too late for the health of the soul. 영혼의 건강을 찾기에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
"Nothing gives rest but the sincere search for truth. 진리를 향한 진실된 탐구만이 진정한 평안을 선사한다.” - 17세기 프랑스 수학자/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과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말을 새긴 향초라니, 이솝의 향초가 밝히는 밤은 문학적이고 시적일 것만 같습니다.
이런 언어가 코스메틱 브랜드에서 쓰기에는 너무 철학적이고 무겁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솝이 건강한 삶과 피부의 균형을 위해 화장품을 만드는, 본질에 집착하는 브랜드라는 점을 생각하면 브랜드 철학을 언어에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솝은 인체의 장기를 보호하는 것이 피부의 근본적인 역할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킨케어 제품의 목적은 '피부가 온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건강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용을 위해 밝기, 탄력 등의 피부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코스메틱 브랜드들과는 스킨케어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죠.
음식에 비유하면 슬로 푸드 같다고 할까요. 이렇게 건강한 피부를 위해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정직하게 탐구하고, 화장품의 올바른 쓰임을 깊게 고민하는 태도는 마케팅 메시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몇 주만에 눈에 띄는 변화를 약속하기보다는, 피부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서두르지 않는 스킨케어를 지향합니다. 핸드크림이 손 피부에 미치는 효과를 설명하기보다는, 우리의 손은 부드럽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고, 조화로운 관계와 전체적인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은유와 암시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이솝의 언어는 동양적인 화법에 가깝습니다. 이솝이 전하는 언어에 브랜드 비전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저는 이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비전: 건강한 삶과 피부의 균형을 위해 세심하게 고안되어 효과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스킨, 헤어, 바디 케어 제품을 제공한다.
타깃: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하고 섬세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
언어: 진정성 있게 더 나은 삶을 제안하는 사려 깊고 따뜻한 언어
(매거진 <B> No.16: Aesop, 이솝 홈페이지를 참고했습니다.)
시각적인 요소에서 아이덴티티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는 브랜드는 많지만, 언어까지 세심하게 관리하는 브랜드는 많지 않은데 이솝은 언어와 비주얼이 같은 재질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보완해 줍니다.
이솝다운 향, 이솝다운 패키지, 이솝다운 매장, 이솝다운 고객 응대 그리고 이솝다운 언어까지. 많은 고객이 이솝을 애정하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도 일관되게 기대가 충족된다는 점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철학자가 되기엔 인내심이 부족하고, 건축가가 되기엔 재능이 부족해서" 뷰티 브랜드를 시작했다는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의 말을 통해 피부에서도 브랜딩에서도 조화와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