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리의 언어 가이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뷰티, 패션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이커머스로 성장하기 전, 작은 스타트업이었던 컬리를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장보기의 대명사는 이마트였고, 새벽배송 서비스가 신기하게만 느껴지던 시절 컬리는 유통업계에 샛별처럼 떠오른 신선한 자극제였습니다.
컬리라는 이름과 메인 컬러인 보라색에서 느껴지는 세련된 이미지부터, 푸드 매거진처럼 공들여 찍은 상품 사진과 세심한 상품 설명. 백화점 식품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입 식재료와 제주도 목초 우유, 핫플레이스 디저트처럼 일반 마트에서 구할 수 없는 식재료들을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문 앞으로 배송해 주는 서비스까지.
저는 그런 컬리에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컬리에서 에디터, 카피라이터로 일하게 되었을 때 내 브랜드를 키우는 것처럼 애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서비스를 더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었거든요. 에디팅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도 서비스 퀄리티가 일관성 있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오프라인으로 식재료를 고를 때는 직접 만져보고, 향을 맡아보고, 시식도 해 볼 수 있지만 온라인에서는 상세페이지 콘텐츠를 통한 간접 경험이 전부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컬리의 에디팅이 가진 책임감은 더 무거웠습니다. 개별 상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도 브랜드 차원에서 일관성 있는 장보기 경험을 제공해야 했으니까요.
가이드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에디팅 팀 인원이 늘어나도 컬리 상세페이지는 한결같을 수 있게, 공통으로 지켜야 할 원칙을 문서화해서 2) 신규 입사자도 컬리 에디팅 시스템을 빠르게 파악하고 궁금할 때마다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죠.
매일의 성장이 중요하던 당시에는 컬리의 브랜드 페르소나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뢰감과 친근함을 중심으로 컬리 에디팅의 톤 앤 매너를 간단히만 정의했습니다.
상품에 관한 정보와 노하우를 신뢰감 있게 전달한다.
어려운 내용도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쉽고 친근하게 전달한다.
상품의 맛과 향, 특징을 직접 보는 것만큼 실감 나게 서술한다.
그리고 상세페이지가 너무 길어지거나 내용이 중복되지 않게 섹션별로 역할과 내용을 구분했습니다.
Intro: 상품 기획 의도를 통해 고객의 흥미 유발
Kurly's Check Point: 상품의 셀링 포인트 요약 및 팩트 체크
Body: 상품의 품질과 차별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상세히 설명
Kurly's Pick: 중량, 형태, 포장 상태, 맛, 향, 질감, 식감 등 상품의 필수 정보 전달
Kurly's Tip: 조리법, 보관법, 주의사항, 부가적인 활용 팁 제공
About Brand: 브랜드의 역사, 철학, 가치 소개
초창기 매거진 기사 형식의 에디팅은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입되는 스토리텔링이 장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입점 상품은 점점 늘어나고, 바쁜 일상을 사는 고객들은 길이가 긴 콘텐츠를 꼼꼼하게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컬리의 상세페이지는 스토리텔링의 장점은 유지하되 구매 유도에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계속 고도화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가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섹션을 명확히 구분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상품 선택 시 꼭 알아야 하는 정보가 눈에 잘 띄도록 Kurly's Pick 섹션을 줄글에서 불릿포인트 목록으로 변경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소고기, 치즈 등 상품 카테고리별 특징에 맞는 가이드를 별도로 만들기도 했고, 제가 상세페이지를 더 이상 담당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가이드는 더 촘촘하게 세분화되면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지금은 상세페이지가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간결해졌지만 컬리만의 색깔은 잃지 않았습니다. 에디팅 가이드를 통해 스토리텔링과 정보 전달력의 균형을 잘 맞추고 있기에, 컬리는 가격 공세를 퍼붓는 이커머스들 가운데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TV-CF를 온에어한 이후 컬리는 브랜드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더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브랜딩에 관한 가이드나 내부적인 합의는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저는 브랜드/마케팅 콘텐츠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콘텐츠 교체 주기가 빠른 이커머스 특성상 늘 여유 없이 콘텐츠를 제작하다 보니 서로 다른 니즈를 가진 팀 간의 합의와 팀 내부 커뮤니케이션에 소모되는 시간조차 아까웠습니다.
이 때문에 팀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컬리다운 카피와 비주얼'의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명확한 가이드가 있다면 고민하는 시간도 줄이고,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에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죠.
우리는 내부 임직원 및 고객 인터뷰 자료와 당시 컬리의 주요 타깃이었던 35~45세 여성의 소비 성향을 통해 컬리의 역할을 푸드 라이프 큐레이터 Food Life Curator로 정의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상품, 취향에 맞는 상품을 선별해 소개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상품 입점부터 소개까지 세심하게 진행하는 큐레이터로서 컬리는 어떤 성격을 가진 브랜드일까?' 고민 끝에 도출한 핵심 페르소나는 믿을 수 있는 Reliable, 다정한 Kind, 트렌디한 Trendy이었고, 저는 이 세 개 키워드를 통해 컬리답게 말하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1. Reliable: 유행어를 남용하지 않고, 전달해야 할 본질에 집중해서 신뢰감을 주는 카피
2. Kind: 공급자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푸시하지 않고, 소비자가 내 이야기처럼 공감하게 만드는 카피
3. Trendy: 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상품과 혜택에 가치를 더하는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카피
이해를 돕기 위해 자사와 타사 카피라이팅을 비교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컬리다운 카피의 To Do 사례와, 컬리답지 않은 Not To Do 사례도 가이드에 포함했습니다.
돼지고기 기획전 카피를 예로 들면,
Not To Do: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To Do: 소고기 안 부러운 인생 돼지고기 만나보기
발랄한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했던 당시의 경쟁사 헬로네이처는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는 유행어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품의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컬리는 버크셔나 이베리코처럼 좋은 품질의 돼지고기를 소개하면서 저평가된 돼지고기를 다시 보게 하는 카피를 써야 더 트렌디하고, 컬리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철 수산 기획전도 마찬가지입니다.
Not To Do: 지금 먹어야 맛있는 가을 제철 수산물
To-Do: 제대로 물오른 가을 바다의 맛
제철이니까 '지금 먹어야 한다'라고 고객을 푸시하는 것보다는 '가을 바다가 한창 물오른 맛으로 가득하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고객이 알아서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더 컬리다운 방식이라고 봤습니다.
제가 컬리를 떠난 지도 꽤 오래되었고, 비즈니스의 방향성이 달라진 지금은 어떤 기준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또 다른 가이드를 만들었겠죠. 제가 만든 가이드가 컬리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을지라도 제게는 큰 자산으로 남았습니다.
명확한 부분보다 희미한 부분이 더 많았던 시기에 합류했기에, 한 브랜드의 글쓰기를 정의하고, 가이드화하고, 실제로 개선하는 경험을 해 볼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컬리의 성공에는 많은 요인이 있지만, 초창기부터 컬리다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컬리의 언어 가이드 사례가 공감된다면, 사람들이 지금 좋아하는 언어보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 브랜드만 쓸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