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라이팅 가이드라인 제작기
UX 라이팅 파트가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현대카드 앱은 세련되고 깔끔한 디자인에 그렇지 못한 라이팅이 아쉬운 앱이었습니다. 사실 앱 카드 결제만 주로 이용했던 사용자 입장에서는 결제 기능만큼이나 직관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라이팅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UX 라이터가 되어, 첫 과제로 UX 라이팅 가이드라인 프로젝트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니 일관성, 정확성, 간결성 측면에서 개선하면 좋을 점들이 보였습니다. 특히 별도의 에디팅/카피라이팅 담당 조직이 있는 스타트업에서 유관부서 담당자들과 긴밀하게 일해왔던 제 입장에서 더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전사의 다양한 부서에서 앱에 노출하는 콘텐츠 내용을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작성자에 따라 톤 앤 매너도, 사용하는 언어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둘째, 각 부서에서 작성한 콘텐츠를 검수하는 프로세스도 있었고, 가이드라인도 있었지만 주요 용어와 띄어쓰기 규칙 중심의 표기법 가이드라인에 가까워서 전체적인 톤 앤 매너를 맞추거나 UX 라이팅 원칙을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이드라인 프로젝트를 리드하게 된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설명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어디에 기준점을 맞춰야 모두에게 실용적인 가이드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의 1차 타깃인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 등의 프로덕트 조직 실무자는 UX 라이팅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만큼 실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단순한 규칙이 필요했고, 2차 타깃인 타 조직 실무자들은 UX 라이팅의 개념부터 적용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톤 앤 매너의 일관성을 위해 UX 라이터를 포함한 모두가 글을 쓸 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분명한 페르소나가 필요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해법은 3가지였습니다.
1. 톤 앤 매너의 기준점이 될 수 있게 앱의 보이스톤을 사람의 성격처럼 정의한다.
2. 가이드의 목차만 봐도 실무자가 필요한 내용을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가이드를 세분화한다.
3. 가이드가 설명하는 규칙을 적용하기 쉽게 Do / Don't 예시를 풍부하게 담는다.
프로젝트 팀은 이 세 가지를 큰 틀로 잡고 6개월에 걸쳐 세부 내용을 완성해 갔습니다.
1. 보이스톤 정의하기
: 어떤 말투와 태도로 사용자와 일관성 있게 대화할까?
프로젝트 팀은 내외부 사용자 설문을 통해 현대카드 앱에서 연상되는 키워드를 수집했습니다. 차별적인 키워드를 찾기 위해 다른 금융 서비스 앱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비교하는 질문도 포함했죠. 내부 직원에게는 현대카드 앱이 지향했으면 하는 이미지와 지양했으면 하는 이미지도 추가로 질문했습니다.
응답 내용을 토대로 치열하게(?) 논의한 끝에 우리는 보이스톤을 '자신감 있는, 세련된, 품격 있는, 위트 있는'의 4개 키워드로 정의했고, 가이드에서 이를 UX 라이팅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유형별로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설명했습니다.
2. 콘텐츠 유형별로 가이드 세분화하기
: 이럴 땐 어떻게 써야 할까?
다른 UX 라이팅/글쓰기 가이드라인 레퍼런스를 찾아봤을 때, 핵심 규칙 위주로 간결하게 작성된 가이드가 가독성은 좋았지만, 모든 케이스를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팀의 목표는 실무자들이 글쓰기에서 궁금했던 점 대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FAQ 같은 가이드를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모든 케이스를 다루면서도 필요한 부분만 쉽게 찾아볼 수 있게 세세하게 목차를 나누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크게는 1) 내용에 맞는 글쓰기 2) 컴포넌트별 글쓰기로 구분하고, 1)에서는 전사의 다양한 부서 실무자들을 위해 [카드 신청 → 이벤트/혜택 안내 → 이탈/해지 프로세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용자 접점에서 각 콘텐츠 내용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하면 현대카드답게 글을 쓸 수 있는지 안내했습니다. 2)는 프로덕트 조직 실무자들에게 더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팝업, 버튼, 공백 상태(Empty Case) 등의 UI 구성 요소별로 지켜야 할 글쓰기 원칙을 다뤘습니다.
3. Do / Don't 예시 작성하기
: 옆에 두고 계속 찾아보게 되는 가이드는 뭐가 다를까?
가이드에 실제 사례를 풍성하게 담는 데 가장 영감을 준 자료는 SK텔레콤의 고객 커뮤니케이션 가이드북인 <사람 잡는 글쓰기>였습니다. 내부 직원용 비매품이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UX 라이터로 일하기 전 지인을 통해 구해 봤었습니다.
고객에게 발송하는 문자 메시지부터 신규 상품 홍보 광고 카피까지 어떻게 하면 더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지, 실제 개선 사례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이드라인이 두꺼운 보고용 문서로 남지 않기를 바랐던 저는 만드는 사람은 괴로워도, SK 텔레콤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넣어야 구성원들이 계속 찾아보는 가이드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쏟아지는 검수 사례들과 UX/UI 디자이너 팀원 분들이 평소 개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례를 모아 하나하나 개선 안을 작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가이드로 한번 만들고 나면 쉽게 바꿀 수 없으니, 결점 없는 개선안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논의와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죠.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은 있었습니다. 전사 대상 설명회 후 실무자들에게 '내용이 알차다'는 호평도 들었고, UX 라이팅 파트 내부에서도, 협업하는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개별 사안에 관해 합의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라인 프로젝트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는 브랜드/마케팅 콘텐츠에서 갑자기 UX 콘텐츠를 다루게 되면서 사고방식 자체를 전환해야 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흑백요리사의 에드워드 리 셰프님처럼 제가 '비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퇴사한 지금 생각해 보면 브랜딩적 사고를 가진 UX 라이터였기 때문에 현대카드 앱만의 색깔이 더해진 라이팅 가이드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의견을 쏟아낸 팀원 분들과 함께였기에 제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채울 수 있었죠.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의미 있어서 제 커리어에서도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언어도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꼭 복잡한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우리 브랜드/프로덕트의 언어는 어떤 보이스톤과 규칙을 가지고 쓰면 좋을지 한 번쯤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즈니스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긍정적인 사용자 경험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구할 때 좋은 기준이 되어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