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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리나 Jan 16. 2022

앤서니 브라운『돼지책』

 어린 시절, 저의 아침을 깨우던 건 엄마의 도마질 소리였습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하게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하시던 도마질 소리가 당연한 걸 넘어서서 편안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야 알게 되었지요. 가정에서 엄마라는 이름에 부과되고 강요되었던 희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런 수고로움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사실 또한요.

그래서일까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처음 읽은 순간, 어떻게 이런 내용을 그림책으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신기함을 넘어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침에 출근하기 전 묵묵하게 청소와 빨래, 침대 정리까지 하고 나가던 피곳 부인을 얼마나 여러 번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모든 일에 있어서 남편과 아이들을 우선시했던 여러 엄마들이 이 그림책을 보면서 저와 마찬가지로 큰 위로를 받았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돼지책 출간 20주년이라고 하여 케익을 사와서 축하하고 아이들과 먹었어요 


그림책은 표지부터가 상징적입니다. 엄마의 등에는 아빠와 두 아들이 업혀있습니다. 엄마의 표정없는 얼굴과 달리 남편은 활짝 웃고 있습니다. 두 아들도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고요. 아침과 저녁마다 피곳 씨와 두 아들이 아내와 엄마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밥 달라는 말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자 어느 날 피곳부인은 "너희들은 돼지야" 라는 쪽지를 남겨두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이 부분에서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요.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 피곳씨와 두 아들은 점차 돼지처럼 변해갑니다. 집안이 엉망이 되고, 먹을 음식조차 찾기 어려워질 무렵 피곳 부인이 돌아옵니다. 피곳씨와 두 아이는 제발 돌아와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에 피곳 부인은 집에 머무르기로 결심했고, 그들은 집안 일을 나누어서 함께 해나갑니다.



고정된 성역할이란 없다는 것을 이보다 더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그림책이 있을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가 자동차를 수리하는 모습을 통해 가정에서 여자가 하는 일과 남자가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성역할에 대한 주제가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유머와 볼거리를 더해서 설득력있고 거부감없이 전달하고 있는게 이 책의 장점입니다. 페이지마다 그려져 있는 돼지 그림 찾는 재미도 선사해주면서요.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의 일이라는 생각을 깨뜨려주는 이 그림책이 새삼 고마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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