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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Nov 03. 2023

나의 최애 떡볶이



밀떡볶이보다는 쌀떡볶이, 기름떡볶이보다는 국물떡볶이, 김밥보다는 김치볶음밥이랑 함께 먹되, 삶은 계란은 꼭 마지막에 국물과 함께 비벼먹어야 제일인 나의 최애 떡볶이 취향.


내 기억 속 첫 떡볶이는 학교 앞 문방구 계란하나 어묵두 개 떡 세 개쯤 들어가는 500원짜리 떡볶이였고, 어릴 적 자주 먹었던 떡볶이는 한우동 스페셜떡볶이로, 갓 배달온 떡볶이에 엄마가 삶아준 라면사리를 곁들여 먹는 맛이 일품이었고, 여중시절 학원가 근처 분식집 앞에 서서 친구들과 나눠먹었던 컵떡볶이, 지금도 유명한 올래시장 안 언니네분식 모닥치기, 프랜차이즈 맛을 알게 해 준 김가네 쌀떡볶이, 대학시절 술과 함께 즐겨 먹었던 고전떡볶이와 아딸떡볶이, 낚시가 취미인 남편을 만나 먹게 된 무늬오징어 떡볶이까지…

매 시즌 새롭고 다양한 떡볶이를 만나며 나의 떡볶이 취향은 그렇게 구체화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고, 그리운 건 고교시절의 떡볶이였다.

그 시작이 어디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교시절 급식 다음으로 엄마밥보다 더 자주 먹었던 게 아마 떡볶이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내내 달고 살았던 떡볶이였다.

개학기념, 생일기념, 모의고사 전 파이팅기념, 모의고사 후 위로기념, 중간기말 전 파이팅기념, 중간기말 후 위로기념, 방학기념 등 기쁘거나 슬프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그 이름도 개성 있는 “고망떡볶이“

(여기서 ‘고망’은 제주어로 ‘구멍’을 뜻한다. 그러니까 표준어로 말하면 구멍떡볶이?)

우리 또래 서귀포따이(서귀포아이) 중에 이 떡볶이 안 먹어본 애는 정말 드물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말 핫했던 고망떡볶이가 내 떡볶이역사의 하이라이트였다.

고교시절 학업만큼이나(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했던 급식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면, 밥팸(급식 같이 먹는 친구들)들과 눈치게임하며 앞다투어 교무실로 향했다.

어느 날은 배가 아프고, 어느 날은 머리가 아프고, 어느 날은 집안행사가 있다는 둥 야간자율학습을 빠질 갖가지 이유를 대어가며 순차적으로 교문을 빠져나와 향했던 그곳에는.

매일 아침 갓 뽑은 쌀떡을 공급받아 반으로 자른 떡과 (떡에 양념이 잘 베이도록 떡을 반으로 잘랐다고 함) 떡사이즈로 얇고 길게 잘라놓은 어묵, 양파, 대파, 계란이 들어간 매운 국물떡볶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매번 새로 조리해 주는 떡볶이는 맵기 조절이 가능했는데, 대체로 매운 편이었으나 투박한 듯 섬세했던 고망분식 주인아줌마는 내가 아는 최고의 기분파 주인장이셨고, 아줌마의 컨디션 혹은 기분에 따라 맵기가 조절되는 기묘한 맛집이었다.

어느 날 아줌마 기분이 몹시 좋아 보여 매운맛을 주문했는데, 하나도 안 맵고 정말 맛있더라. 또 어떤 날에는 아줌마 강아지가 자꾸 짖길래 시끄럽다 한마디 했더니, 중간맛을 최고 매운맛으로 만들어줘서 먹고 다음날 피똥을 쌌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아줌마 강아지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며 칭찬했더니 인생 최고의 떡볶이를 선사해 주셨다 등등등.

수많은 단골들의 후기 분석을 통해 고3즈음엔 주인아줌마의 그날 기분에 맞춰 맵기 조절을 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메뉴판보다 아줌마의 바이오리듬을 먼저 살피며 맵기를 조절하고, 만족스러운 맵기의 떡볶이와 함께 먹었던 ‘김치볶음밥’(이 또한 매운데 묘하게 맛있어서 인기였다) 맛이 아직도 추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나의 떡볶이 취향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고시절의 단맛짠맛쓴맛이 모두 녹아있는 그 떡볶이가 나의 떡볶이 역사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았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얼마되지 않아 장기간 문을 닫았다는 소식, 중앙로터리 부근에 아줌마 딸인지 조카인지 하는 사람이 새로 오픈했으나 맛이 바뀌었다는 소식, 결국엔 아줌마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곳조차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그 분식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직도 여고동창들을 만나면 ‘고망떡볶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정도인데 이젠 다시 그 떡볶이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앞으로도 그 맛을 재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그때 레시피라도 물어볼걸. 아, 어차피 기분파사장님은 알려주지 않으셨겠지만) 한스럽다.

요즘 같이 완연한 가을 분위기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떡볶이 한 그릇에 내 심신을 맡기고 싶은 날이면 추억의 고망분식 떡볶이를 떠올리곤 한다.

만약, 다시 추억의 그 맛을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분식집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아줌마의 바이오리듬을 살피고,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이를 칭찬하며 인생떡볶이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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