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이 좋아서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버스도, 기차도 마음껏 타고 싶은 날.

by 지안
포르투 여행_1.jpg 2019, Porto


버스 타는 일을 좋아한다.

창문에 스며들어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는 햇빛이 반갑다.

평소에 걷던 거리가 아닌 다른 거리를 지나갈 때면 낯선 풍경에 기분도 새롭다.

뻥 뚫린 도로를 부지런히 달릴 때는 그 속도를 즐기고,

신호에 걸리면 잠시 멈춘 곳의 풍경을 구석구석 바라본다.

어떤 속도로 어디까지 가더라도, 버스에 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기사님이 열심히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누리는 것.

버스를 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기차 타는 일도 좋아한다. 이유는 비슷하다.

버스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에 있으면 마음이 시원하다.

다른 도시에 간다는 설렘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

평소와 다른 하루를 살아보고 싶은 날이면 버스나 기차를 찾는다.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두 눈에 붙잡아 두고 싶은 날.

버스도, 기차도 마음껏 타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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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Porto | 에센시아 루사


밥도 배불리 먹었겠다.

하늘도 파랗고, 날씨도 따뜻하겠다.

멀리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사진 한 장만 보고 목적지를 정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포르투갈 북부 도시, 브라가 Braga다.

브라가에 있는 봉 제수스 두 몬테 Bom Jesus do Monte 사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지그재그 계단을 올라야 성당으로 갈 수 있는데,

성당까지 가는 길을 멋스럽게 꾸며둔 이곳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브라가까지는 기차로 1시간, 봉 제수스 두 몬테까지는 버스로 20분을 더 가야 했다.

기차와 버스를 모두 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어떤 풍경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일까. 실제로 봐도 사진만큼 멋있을까.

기대를 안고 상벤투 역에서 브라가행 기차를 탔다.


포르투 여행_5.jpg 2019, Porto


덜컹덜컹-


포르투의 기차는 마음이 편해지는 속도로 달린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다. 오늘의 나에게 꼭 맞는 속도였다.

도시를 살짝 벗어나자 창밖으로 비닐하우스와 초록빛의 논과 밭이 이어졌다.

멀리서 보면 여느 한국의 시골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집들은 대부분 붉은색 지붕을 갖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부지런히 바뀌는 모습이 좋아 눈을 떼지 못했다.

앉은 쪽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가까운 쪽 창문을 바라보다가.

이 풍경은 지금밖에 못 보겠지 싶어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다 보니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포르투 여행_8.jpg 2019, Porto


브라가역에서 산타 바바라 정원 Jardim de Santa Bárbara까지 걸어가 2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브라가 외곽 에스피뉴 산 Mount Espinho에 위치한

봉 제수스 두 몬테까지 가기 위해 꽤 많은 커브를 돌았다.

언덕을 올라갈수록, 세상은 점점 작아졌다.

언덕 아래로 빨간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가드레일을 따라 울타리처럼 심어진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따사로웠다.

이런 풍경이라면 40분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내리지 말까....’


고민이 무색하게, 버스는 순식간에 나를 봉 제수스 두 몬테 초입에 데려다 놓았다.

종점이었다.


포르투 여행_12.jpg 2019, Porto


높게 뻗은 진녹색 나무 사이로 성당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완연한 봄 날씨였다.

추울까 봐 챙겨간 재킷이 짐이 되었다.

푸르른 녹음은 그늘을 만들어주다가도, 봄바람에 밀려 햇빛에게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다.


계단을 한참을 올랐지만, 지그재그 계단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내걸을 때마다 따사로운 햇볕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수력 푸니쿨라를 타면 언덕을 쉽게 오를 수 있다는데,

나는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걸 선택했다.

태양은 뜨거웠지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분이 좋았으니까. 걷기 좋은 완벽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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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까지 가는 길이 좋아서 이 길이 계속 이어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즈음,

눈앞에 봉 제수스 두 몬테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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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Porto


장관을 바라보고만 있을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계단을 올랐다.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으려 몇 번이고 멈춰 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보았을 때의 감동을 느끼고 싶었다.


한참을 걸어 정상에 다다랐다.

아래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성당의 입구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올라오는 동안 참아두었던 풍경을 볼 차례였다.


한껏 기대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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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이는 풍경에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생각만큼 감동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더 좋았기 때문일까.

성당 안을 구경해도 큰 감흥이 들지 않아 쓱 둘러보고 나왔다.


내 감동은 아까 끝나버렸다.

파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걸어오던 순간.

에스피뉴 산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봤던 풍경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더 좋았다.

보고 싶었던 봉 제수스 두 몬테를 처음 본 순간도 물론 좋았지만,

길 위에서 만난 장면들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래, 버스와 기차가 타고 싶어서 출발한 근교여행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좋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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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날아갔다.

푸르던 하늘은 점점 노란빛으로 물들어 갔다.

기차 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성당도 잠깐밖에 구경하지 못했고, 주변을 더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괜찮았다.


남겨두고 온 풍경은 어느 날 다시 올 나를 기쁘게 맞아줄 테니까.

브라가에 다시 올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니까.

언젠가 다시 찾은 이곳에서, 그날의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안녕, 브라가!




사랑의 순간으로 가득했던 포르투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매주 금요일에 반갑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