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과 여행하는 일

처음 보는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한다고?

by 지안
목차
- 혼자였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세상
-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도시
- 그날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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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였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세상


‘처음 보는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한다고? 그렇게 여행하는 사람도 꽤 많나 보다.’


내가 사는 세상은 좁았다. 여행은 친한 사람끼리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과 장소만 맞으면 함께 여행하는 세상도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다채로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유럽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카페에 들어갔다. 동행을 찾는 게시판에는 수많은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대부분 '몇 월 며칠 어느 나라 동행 구해요.'의 형식이었다. 4월 14일, 딱 내가 원하는 날 동행을 구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밝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시간을 같이 보내도 좋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여행할 수 있을지 두려움도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우물 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댓글을 남겼다.


"저랑 같이 여행하실래요?"


2022, Porto


열한 시, 렐루 서점 앞.

시간과 장소만 정해둔 만남이었다.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게 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르는 사람과 여행을 한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가 열두 시간을 내내 같이 다니게 될 줄은.


오늘 하루를 함께 할 그녀는, 나보다 두 살 많은 교환학생 중인 언니였다. 종일 포르투에 있는 날은 이날뿐이라, 부지런히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좋았다. 내 하루를 언니에게 맡겼다. 먼저 산투 알폰소 성당, 알마스 성당을 차례로 구경했다. 그동안 발길 닿는 대로만 여행하다 보니 여행 5일 차인데도 아직 못 가본 곳들이었다.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13.jpg 2022, Porto


“우리.. 안에 들어가 볼까요?”

“좋아요!”


날씨가 흐려서 그랬을까. 회색빛이 묻어있는 산투 알폰소 외관을 한참 구경하던 나에게 언니가 물었다. 성당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한참 예배 시간인 듯했다. 앞장선 언니를 따라 들어가니 오르간 소리를 반주로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과연 언제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외관을 스쳐 지나가는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언니 덕분에 온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다. 내 세상이 부지런히 넓어지고 있었다. 파리 여행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젤라토를 포르투에서 먹었다. 돈을 아껴 쓰던 중이었지만, 포르투에서 파리 여행자가 된 기분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큰맘 먹고 마카롱 토핑도 추가했다. 포르투에서 처음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손을 뻗어 사진을 한 장 찍은 그 순간.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1.jpg 2019, Porto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민 끝에 추가한 마카롱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내 손에는 젤라토만 남아있었다. 마카롱 없는 젤라토였다.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닌 게 어딘가. 언니가 본인 젤라토에 올라간 마카롱 한 입을 권했지만, 오늘의 나는 마카롱이랑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 몫의 마카롱을 떠나보내고, 아쉬운 대로 한 숟가락 크게 떠먹었다. 입안에서 진한 초코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마카롱이 없어도 충분하지? 하며 나를 달래는 듯한 달콤함이었다.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15.jpg 2022, Porto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달콤함을 채웠으니, 이제 짠 음식을 먹으러 갈 차례였다. 단짠단짠의 균형은 점심으로 맞추기로 했다. 언니가 궁금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타파벤토 Tapabento는 무려 한국어 메뉴판도 준비되어 있는 식당이었다. 큰 고민 없이 대표 메뉴라는 해물찜과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우리 와인도 한 잔 할까요? 어떤 와인이 좋아요?”


포르투 하면 와인, 와인 하면 포르투였다. 나는 스위트 와인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사 먹었던 와인은 너무 썼다고 주절주절 아쉬움을 이야기하니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능숙한 영어로 직원에게 스위트 와인을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다. 직원은 웃으며 그럼 이 와인 한번 먹어보라며 쪼르르- 따라주었다.


“맛있다!”


둘 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눈이 커졌다. 이렇게 달달한 와인도 있는 거였어! 입맛에 꼭 맞는 와인을 드디어 만났다. 언니 입맛에도 맞는 듯했다. 산뜻하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뿅- 구해다 준 언니가 마법사 같았다. 주문한 음식도 모두 맛있었다. 신선한 해물이 잔뜩 들어간 해물찜도 간이 좋았지만, 내 입맛을 사로잡은 메뉴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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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Porto


고구마와 당근을 갈아 만든 부드러운 퓌레. 여러 가지 베리를 섞어 만들었는지 상큼한 소스. 이 두 가지를 함께 곁들여 먹는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는 앉은자리에서 한 그릇 더 먹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달달한 술 한 잔에 긴장을 모조리 내려놓았다. 언니랑 마치 몇 번 만난 적 있는 사이처럼 이야기도 잘 통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언니랑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대화도 깊어졌다. 자연스럽게 말도 편하게 하기로 했다.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0.jpg 2022, Porto


“우리 크루즈 탈까? 내가 살게.”

“아냐 언니. 내가 내도 돼!”

“내가 내줄게, 같이 타자!”


언니가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언니는 내 세상을 넓혀주러 온 개척자인 게 분명했다. 종일 새로운 곳에 데려가 주고, 맛있는 음식도 찾아줘서 오히려 내가 뱃값을 내도 모자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내가 졌다. 언니 고집이 완고했다. 이제 나는 남은 시간 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야 했다. 뱃값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선물을 주는 게 좋을까, 밥을 사는 게 좋을까 머릿속을 바쁘게 굴리며 크루즈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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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크루즈는 그저 풍경의 일부였는데, 순식간에 그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마침, 종일 회색빛이었던 하늘도 개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비집고 들어왔다. 함께 크루즈를 탄 사람들의 표정에도 미소가 번졌다. 도루강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반짝거렸다. 우우웅- 크루즈는 도루강의 물살을 힘차게 가르고 꽤 멀리까지 나아갔다. 관광지를 살짝 벗어난 풍경이 낯설었다. 한적했다. 이제 막 짓고 있는 듯한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오래된 건축물만 있는 도시인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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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밤이 되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벌써 밥을 두 끼나 같이 먹었다. 언니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두 번째 식당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며 나를 데려갔다. 무계획을 좋아하는 나에게, 누군가의 취향이 잔뜩 묻은 하루는 마치 선물 상자를 하나씩 천천히 풀어보는 것 같았다. 언니는 궁금했던 곳을 다 가보고, 나 또한 다음에는 어디를 가게 될까 기대돼서 좋은 하루를 보냈다.


저녁도 맛있었다. 까르보나라는 꾸덕하고 짭짤했고, 라자냐는 쫀득하고 짭짤했다. 유럽 음식은 짜다던데, 정말 짰다. 그래도 맛있는 맛은 감춰지지 않았다. 콜라를 혼자 두 개나 먹었지만, 또 먹겠냐고 하면 당연히 그러겠다고 답할 만큼 맛있었다. 종일 새로운 곳에 데려다준 값은 치르지 못했지만, 뱃값은 저녁으로 갚았다. 아무도 검사하지 않는 숙제를 해결해 마음이 개운했다.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9.jpg 2019, Porto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도시


밤이 되자 언니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 Vila Nova de Gaia 지구에 있는 세하 두 필라르 수도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동안 야경은 히베이라 광장 Praça da Ribeira에서 수도원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높은 곳에서 바라본 포르투의 야경은 최고였다. 언니도 방학 중에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했지만, 포르투 야경이 제일 예쁜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라고는 포르투가 처음이었지만,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어둠이 도시의 색을 삼켜버렸는데도 포르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실물이 담기지 않을 만큼.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 곳곳이 오렌지빛으로 반짝였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위로는 노란색 전차와 사람이 각자의 영역을 지나다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미니어처 세상에 놀러 온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칠흑이 있어야 반짝임도 볼 수 있는 거였다. 언제 또 이런 황홀한 야경을 볼 수 있을까. 아마 그건, 다시 포르투에 돌아왔을 때일 테지.


나의 사랑, 나의 포르투_10.jpg 2019, Porto | 아름다움이 사진에 담기지 않아 아쉬운 마음


“사실 오늘, 나랑 안 맞는 사람이 나왔으면 일찍 헤어지고 혼자 다니려고 했어.”

헤어지기 전,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걱정했는데 너무 즐거웠어!”

“동행 몇 번 구해봤는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랑 종일 함께 다닌 건 네가 처음이야.”


다행이었다.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경험처럼 안 맞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반나절을 붙어있어도 괜찮은 사이였다. 시간과 장소가 맞는다는 이유 하나로 성사된 만남이었다. 어떤 사람일지 만나기 전까지 알 수 없어 기대되기도, 걱정되기도 하는 이 만남의 끝이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내 여행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우물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건 나의 의지였지만, 우물 밖에는 이런 세상도 있다며 이곳저곳 구경시켜 준 건 언니였다. 혼자 하는 여행은 자유로워서 좋지만, 함께 하는 여행은 다채로워서 좋구나. 종일 돌아다녀 온몸이 무거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날 이후의 이야기


3년 후


“언니 안녕! 나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포르투에서 배도 타고 하루 종일 같이 다녔던 사람인데! 생일이라고 알림 뜨길래 연락해 봤어. 포르투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 또 가려고 마침 계획 중이었거든! 아, 이건 작은 선물이야. 잊고 있었는데 이전 대화를 보니 내가 차비를 꿨었다고 하길래! 생일 즐겁게 보내!”


“헉. 나 기억해! 우리 포르투 와인 시음도 같이하고, 엄청 맛있는 집 가서 오리고기도 같이 먹었잖아! 연락해 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나한테도 포르투는 너무 좋은 기억이어서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거든. 네가 연락해 주니까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너무 좋다. 여행 이후에 파리 갔다가 핸드폰 도둑맞아서 사진을 다 잃어버렸거든. 근데 이렇게 연락받으니까 그 기억이 떠올라서 너무 좋아.”


“맞아! 언니 덕분에 맛있는 오리고기랑 라자냐 먹어서 그 음식들이 난 아직도 좋더라고. 핸드폰을 도둑맞았었다니, 사진도 다 없어져서 너무 아쉬웠겠다. 혹시 나중에 드라이브에 사진 남아있다면 보내줄게!”


“정말 고마워. 야근하다가 행복해졌다! 고마워 지안아, 진짜로. 나한테 좋은 기운 준 만큼 너도 행복한 하루 보내면 좋겠다!”


“생일에 야근이라니. 파이팅! 나도 언니 생일 기운 받아서 좋은 하루 보낼게. 좋은 추억 만들어줘서 고마워!”




사랑의 순간으로 가득했던 포르투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매주 금요일에 반갑게 만나요!





*2019년의 기록을 담은 글이지만, 그때 남겨둔 사진이 많지 않아 몇 장은 2022년 포르투에서 찍은 사진을 함께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