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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an 20. 2024

속 시원한 대구탕, 속 시원한 한 끼

간만에 부산에 간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세상에 제일 돈 아까운게 멀쩡한 우산 집에 놔두고 객지에서 우산사는 일이다. 그냥 뒤집어쓸까 아니면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가 결국 사고말았다. 예전에는 편의점에 접이식이 아니어도 길이가 긴 것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고른 것은 70센티미터 짜리다. 별게 다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매순간 사소한 기쁨 앞에 대박이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로 대박의 순간을 내가 맞이한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비바람이 치는 바다….어디서 많이 듣던 대목이다. 해운대 바닷가에 비바람이 친다.


해운대 바다바람을 쐬었던 낭만적인 순간들을 떠올리다가 말았다. 셀 수없이 많은 젊은 날의 추억들이 거기 묻혀 있어서 캐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올라가는 길에 글을 쓸 때 떠올려보기로 하고 잠시 옆으로 밀어놓았다. 해운대 역에서 웨스틴조선호텔로 향하는 길에 식당들이 즐비한데 딱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을 발견하기 어렵다. 돼지국밥집에는 줄이 서있어서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비가오는 날씨에 대기하고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약속시간도 다가오고 해서 바로 들어가서 먹을 곳을 찾는다.

마침내 내 시선을 사로잡은 노란 간판, 그런데 바로 옆에 돼지국밥 명가 식당이 나란히 있다. 돼지국밥 국물은 시원하다기 보다는 아늑한 느낌, 고기 육수를 오래 우려내어 몸에 든든한 느낌, 반면 대구탕은 왠지 처음부터 끝까지 시원한 세계로 안내할 것 같은 생각. 결국 시원한 쪽을 택했다. 다음에 여기오면 아늑한 돼지국밥을 반드시 선택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이제는 유명한 사람들이 싸인해놓은 액자들이 약간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아는 맛의 세계로 갈 것이다. 누구의 안내를 받고 싶지 않다.

아 ! 국물 한 술을 뜨니 그 시원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두 술을 더 떠먹은 후, 후추가루를 뿌린다. 가위를 달래려다가 그냥 손으로 고추를 뜯어서 탕에 양파와 함께 넣었다. 캡사이신의 매운 향이 스물스물 올라와 처음에는 향긋하다가 나중에는 약간 겁이 난다. 고추는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국물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충분히 만족감을 준다. 대구살은 퍽퍽하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쫀득하지 않 중간 어느 지점엔가의 식감을 준다. 퍽퍽함과 쫀득함 사이를 1-10으로 설정하면, 6.7수준이다. 처음에는 와사비와 간장과 식초를 버무린 소스에 찍어 먹는다. 음 이건 예상했던 맛이다. 와사비는 쏘지 않는다쏘지 않는 와사비는 무늬만 와사비인데,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다데기를 살짝 올려 먹는다. 간이 배어있지 않아 양념들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것들의 맛이 대구살에 그대로 묻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입안에서 섞인다. 미각을 자극하지 않는 냉정한 맛이라고나 할까 ? 그렇다고 무맛은 전혀 아니다. 그러고보니 다데기는 자극적이지 않다.


다음번에 다시 먹는다면 고추를 넣지 않고 1/3쯤 먹다가 다데기를 풀어서 먹어보련다. 대구껍데기는 여느 생선껍데기와 달리, 살과 어우러져 한 몸의 식감을 선사한다. 대구살과 껍질을 다 먹고난뒤 시선을 김과 애호박 무침, 마늘쫑 무침과 깎뚜기로 눈을 돌린다. 아 !! 어묵무침은 예전에 어머님께서 해주시던 어묵맛을 생각나게 한다. 어묵깊이 들어있는 생선뼈와 살이 녹아 재창조된 이 음식의 식감은 어린 시절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밀가루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어묵맛을 오랜만에 맛본다. 김 두장에 어묵과 밥 반숟가락, 마늘쫑 한 쪽과 애호박무침 한 쪽, 깍뚜기 한 쪽을 올린 쌈은 입안에서 내가 사용할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밥 1/3지점에서 멈추고 뚜껑을 덮는다. 오후에 허기짐 혹은 공복감을 즐기기 위해.

일본어로 <오다행>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2014년 해운대를 떠올렸다. 그 밤에 일찍 잠들기 아쉬워서 숙소 근처 생맥주를 파는 이 가게에 왔었다. 그 때는 간판을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그 문구다. 그래 삶에 다행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 오륙도가 보이는 오른쪽 끝과 달맞이 고개가 보이는 왼쪽 끝을 바라보며,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떠올린다. 노래가 없어도 노래가 흘러나오고 그 노래가 비와 바람과 파도소리에 같이 묻어서 나에게 다가온다.

1980년 여름 태백에서 부산진역까지 가는 길에 보았던 해운대역

1999년 가을 세미나 끝나고 파라다이스호텔 베란다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바라보던 해운대 밤바다

2004년 가을 후배들이 바다물에 밀어넣어 날아가버린 안경과 휴대전화, 그리고 시원한 바닷물

그리고 2024년 지금 여기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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