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밥 한 끼 나눌 여유를 갖지 못했었는데, 모처럼 어머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외출이 허용되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검색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메밀막국수 가게가 있다. 시원한 걸 좋아하시니 안성맞춤이다. 가게 상호에 ’~~ 터‘라는 명칭을 붙여놓아 친근감이 든다. 편안한 서식지이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맛이 탄생하는 곳이라는 느낌도 줘서 그렇다. 느낌은 그냥 느낌이다. 거기에 무슨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을 필요가 있는가?
메밀 함량 100%라는 멀고도 험한 길에 들어선 가게 주인들은 긴장해야 한다. 주문과 동시에 면을 삶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 가게의 노하우는 무언지 궁금해진다.
파란 열무의 싱싱한 초록빛과 붉은 고추 조각들이 빚어낸 모양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열무 한 점을 입안에 넣고 아삭한 식감과 그 무덤덤하면서도 시원한 간이 슬쩍 배이다만 맛을 깊이 음미한다. 잘 익은 열무의 시큼하면서도 시원한 맛과 달리 미세한 시큼함이 입안 침샘을 자극한다. 아밀라아제는 치아가 씹어야 할 일을 덜어주면서 장들이 소화시키는 수고를 덜어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을 먹는 습관을 들이고 있던 터라 기분 좋은 느낌이 스친다. 단 한번 재생하고 몸속으로 흡수되는 음식은 하나의 작품으로 대접받기에 손색없다. 미세한 시큼함이 열어주는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니 밭 깊숙한 곳의 옅은 흙내음 머금은 시원함의 광장이 펼쳐진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은 어린아이들의 팔짝팔짝 뛰는 기운을 생각나게 할 만큼 생동감이 있어서 좋았다.
메밀을 껍질을 살린 채로 갈아 만든 왕만두 껍질의 구릿빛 표면에 매료된다. 만두소 초록빛이 풍기는 건강함과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드디어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 그리고 궁금했던 명태회무침이 차례로 등장한다. 만들어준 분들의 계획과 먹는 사람의 계획이 따로 있는 법, 열무와 무김치, 명태회와 수육에 새우젓 한두 점을 얹어 메밀면을 조합하여 한 입 머금는다. 비빔밥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여러 음식을 섞어 먹는 습관이 생겼다. 입안에서 식재료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존재감을 뿜어내는 향연을 입안 가득 느끼는 즐거움.
제각각인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렵고도 즐거운 일이다. 내면 한 겹 안으로 들어가면 소우주가 펼쳐진다. 그냥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래도록 깊이깊이 만나고 대화해야 그 한 꺼풀이라도 알 수 있는 세계다. 막국수도 제각각이어서 단 한번 맛을 음미하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고 맛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머님을 통해 알게 된 가게이니 자주 뵈러 오면 더더욱 그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맛으로 족하다.
마주한 어머님과 가족들과 한 끼니를 나누는 행복감에 맛이 파묻히는 느낌,
지금 여기, 온 식구, 웃음, 맛....
더위도 사라지고 허기도 사라지고 평온함이 주변을 감싼다.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그 세계가 내 몸의 생태계와 조합을 이루는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신기하다. 왜냐하면 그 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이 여기를 왔다 갔다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을 통해 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훨씬 힘찬 걸음을 내딛으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가게 뒤편 개울과 산천의 풍경을 감상하는 뒷맛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