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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21. 2024

비엔나에서 3일 : #2 발길 닿는 대로

@1. 간단 조식 - 장내 미생물과의 대화

첫날 잠을 설치느냐 푹자느냐의 경계 어딘가를 헤매다가 아침을 맞았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 가장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이다. 계획에 의해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곳으로 가게 되면 우연히 마주칠 수많은 풍경과 경험들을 놓치게 된다. 남들이 가본 것은 남들에게, 우리가 가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남은 2주일을 매일 무계획적으로 발길 닿는 대로 가기로 정한다. 그러려면 일단 든든히 먹어야 한다. 든든히라는 단어에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포함되지 않는다. 적절히 단백질과 복합탄수화물이 든 채소와 과일을 균형 있게 먹는 습관을 들인 지 1년 남짓 되었다.  


조식 뷔페 차림상을 일단 스캐닝했다. 꼭 필요한 음식들만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삶은 계란, 크림치즈는 그동안 유럽 다니면서 별로 맛보지 못한 숙성된 맛. 그리고 손질해서 먹기 좋게 통에 담긴 과일들, 요구르트에 각종 견과류와 크랜베리, 말린 과일 등을 담아 먹었다. 장내 미생물에게 좋은 먹이가 될만한 음식들로만 구성했다. 빵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다. 통밀빵이 최선의 선택이다. 포만감은 낮추고 기운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검은색 빵 한 조각, 여기에 고소한 콩맛이 나는 비건 햄. 치즈도 종류별로 한 조각씩, 오이 슬라이스까지 한 입 가득 담는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례행위이다. 들판과 수확한 농부의 노고와 대지의 기운과 바람과 비와 햇빛들이 고루 투영된 식재료가 내 몸속 세포들과 어우러질 한 판의 거대한 축제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로열 얼그레이 차는 자극적이지 않고 우아한 맛을 선사했다. 비엔나라서 아마 약간 더 오버된 감정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과장하고 선을 넘어서는 뇌의 작용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새로운 경험의 영역이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내린 뒤, 뜨거운 물을 잔뜩 부어 마신다. 신맛이 별로 없고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 그동안 먹었던 원두와는 다른 종류. 약간 과식했는데,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다. 채소과일과 발효음식이 주는 선물이다. 위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무리하지 않도록 해야 하루종일 걸어도 돌발상황을 만나지 않는다.


@2. 발길 닿는 곳으로

각자 짐을 정리하고 오늘 여행 계획을 세운다. 첫날은 어디 가고 둘째 날은 어디 가고 셋째 날은 어디 가는 여행 일정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서 다니는 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그리고 당일날 멤버들의 컨디션을 살피면서 그냥 가는 것이 좋다. 식구들도 나에게 온전히 일정을 맡기기로 약속해서 서로 합이 잘 맞는다. 여행에서 멤버들과 합이 잘 맞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소한 일로 감정에 금이 가면 기억에 남는 추억은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가장 좋았을 때는 아무 계획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던 순간들이었다.

숙소 근처 특이한 건물들을 폰에 담는다. 어느 곳이건 꽃이나 풀을 가까이하는 풍경이 마음에 든다. 저 휘어진 곡선을 만들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터, 아름다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사람 살이도 마찬가지다. 우아한 순간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난 30년간 한 조직에서 근무하며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10년에 한 번 주어지는 달콤한 한 달의 직무연수. 내가 속한 조직에 감사한 마음과 그동안 일들이 서로 오버랩된다.


첫날부터 날씨가 기기 막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작은 공원에서 숲의 향기를 맡고, 경치를 감상하며 잠시 멍 때린다. 오늘 얼마나 많은 멍을 때릴지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제약조건도 없이 멍 때릴 수 있는 순간을 즐기리라. 트램이나 전철 혹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비엔나 중심으로 갈 계획을 공유한다. 다들 좋다고 했다. 여행을 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사진과 내 발에 새겨진 길이다. 발로 걸어간 길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유럽에 오면 가장 좋은 순간이 두 가지다. 바로 이 상쾌한 공기, 그리고 맛있는 맥주 한 모금.

@3. 벨베데레 궁전 가는 길


벨베데레 궁전입구를 조금 지나 빈 벤치에 잠시 앉아 풍경과 사람 구경하며 멍 때린다. 흩어진 낙엽들이 초록의 잔디와 한데 어울려있다. 사라질 것들과 남아있는 것들이 서로 잘 어울려있다. 사람 살이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사라지는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모듬살이다. 조셉 캠벨 선생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저 <모듬살이>의 지혜를 한번 더 되새긴다. 저기 비엔나 사람들과 우리들이 서로 직접적 대화를 하지 않아도 하나의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에너지를 주고받고 있음을 느낀다.


5년 전 마이리얼트립 프로그램으로 여기 왔었는데, 그때는 상궁으로 직진했다. 오늘은 상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후문으로 들어가는 코스다. 이 코스가 전체적으로 보면 최선의 선택인 거 같다. 마치 교향곡의 4악장처럼 입구에서 상궁까지 '궁전으로 안내하는' 1악장, 상궁 안에서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2악장, 상궁을 나와 정원을 걸어내려가는 '탁 트인 풍경과 상궁과 하궁을 연결하는' 3악장, 그리고 마지막 하궁에서 마침표를 찍는 4악장. 여행을 하면 창의성의 공간이 열린다. 이런 신박한 해석을 하고 있다니….


상궁 정면 앞 연못의 물결이 잔잔하다.

연못과 상궁과 가을 옷을 입은 나무들,

초록의 잔디,

오가는 사람들,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신선한 공기,

걷거나 멍 때리고 있는 나의 시선....


여행을 하면서

얻게되는 진귀한 보물들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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