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저귀를 벗은 나이에 나무계단에 서서 오줌을 당당히 쌌어. 아들로 태어났어했는데” 누군가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 전한 이야기가 대부분의 기억을 차지한다.
최초의 순수한 나의 기억은 꿈이다. 실제 본 것과도 같은 이미지가 각인된 그날의 장면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달랑 네 집이 서로에게 기대어있는 한동짜리 연립주택, 맨 오른쪽 나무문으로 들어가면 이층 집이 나오는 곳 나의 첫 번째 집이다.
옆의 세 집이 가스보일러로 바뀌는 동안 우리 집 문 밖엔 불씨를 꺼트리면 안 되는 연탄보일러가 그늘진 창고 건물과 마당을 이어주었다.
정원이라 부르기엔 여느 부잣집 마당처럼 감나무도 뽀얀 목련도 없었지만 덕분에 너무 쓸쓸하지 않게 사람 사는 곳 같아 보이게 하는 정원엔 서로 어울리지 않는 풀과 나무가 바로 옆 공터의 오래도록 치우지 않은 공사자재들처럼 허술하게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마당엔 육각형 모양으로 된 시멘트 블록이 깔려있어 네 집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약속 없이 어슬렁거리고 모이기에 좋았다. 딱지치기도, 구슬 따먹기도 비가 오면 우산을 모아 텐트를 치기에도 괜찮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마당을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네 집의 가족 수보다 늘 많았다. 앞뒤로 철문도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골목을 질러가는 샛 길로 사용했다. 네 집 아이들의 것이어야만 하는 마당에 모르는 사람들의 영역 침범은 나에겐 못마땅한 것이었다. 어른들은 막을 수없어 노려 보았고, 내 또래 아이들은 지나가는 꼴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듯 마당에 나가 우리 집인데 네가 왜 들어오냐고 무안을 주었다. 그런 어린이는 네 집 중에 나밖에 없었다.
할머니, 아빠, 엄마, 오빠, 언니, 나까지 6명이라는 숫자는 방 두 개에 비해 많았지만 집엔 늘 사람이 없었다.
옆집의 아이들이 학원을 가는 시간엔 그 건물은 나 혼자의 것이었다. 비어있는 집은 유난히 조용했고 방에 불을 켜지 않아도 훤한 어느 낮,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내지 않고 문 쪽으로 갔고 나무문 옆 반투명 유리 사이로 밖에 서있는 형체를 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두려움에 입을 다물고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것은 크고 검은 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문 손잡이를 빠르게 돌리는 소리로 그는 힘이 셌고 위험하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문은 흔들렸다. 밖의 그가 계속해서 문을 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문을 열려는 건지 부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만 점점 크게 울리고 있었다.
허술하게 하나의 잠금장치 만으로 집을 지키던 나무문은, 문 앞의 커다란 형체를 한 그에 의해 점점 틈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틈으로 뚫고 들어오는 빛도 점점 커져 집안이 밝아지고 있었다. 곧 열릴 거 같아 무서웠지만 문 쪽으로 가, 하나밖에 없던 열쇠 손잡이 위로 매달린 작은 철 고리를 걸기 위해 애썼지만, 밖에서 안으로 미는 힘을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그는 크고 셌다. 걸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고리를 채 걸지도 못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덜컹하고 열려버린 문 뒤의 그를 그대로 가까이에서 마주해야 했다.
그는 회색 털을 가진 거대한 토끼였다. 그의 등 뒤로 비치는 햇빛에 집안 가득 그의 그림자로 덮였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계속해서 문 닫기를 시도했지만 문보다 높은 그의 귀가 집안으로 쉽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귀 아래 보이는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눈에서 피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막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계속 문에서 그와 대치했다. 계속해서 꿈이 깰 때까지……
한동안 내게 꿈이란 공백으로 비어있었다. 머리만 닿으면 자던 시절엔 숙면으로 지워졌기에 꿈같은 것이 낄 틈이 없었다. 어린 내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꿈이 최근 들어 수면제를 먹어도 깨끗하고 맑은 잠을 잘 수 없어 깨고 자고를 반복하는 동안 드라마 시리즈물처럼 다시 부활했다. 그 꿈들의 공통점은 누가 자꾸 집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구소련에서 온 얼굴을 한 하얀 피부의 배관공들이 웃통을 벗고 집에 들어와 있기도 하고,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여럿 집 문 앞을 막고 서있어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기도 한다. 만나도 인사를 받지 않는 불친절한 친척, 만나고 싶지도 않은 친적들이 내 집에 눌러앉아 내 물건을 만지고 사용하고 그들이 문단속을 허술하게 해 집안에 있어야 하는 고양이가 밖으로 나가는 잃어버리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주로 누군가 내 영역에 침범하는 꿈이다. 만나지 않아도 되는 타인이 자꾸만 나타난다.
단단한 이중문을 다는 날이오면,숙면을 할 수 있을까?
그럼 더 이상 이들을 만나지 않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