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관점, 정말로 고객의 관점이 맞나요? 정말로?
서비스 경험 디자인, 디자인 싱킹, 서비스 기획 ...
직무 성장을 위해 참고하면 좋을만한 책들은 정말 많습니다. 몇 권 사서 손에 닿는 곳에 두기도 하고, 출퇴근길에 읽을 생각으로 밀리의 서재에 담아두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을 담아두고 몇 달이 흘렀습니다. 지난 몇 달 내내 '일'의 영역에서의 성장을 고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아두었던 책 들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만일 직무 스킬이나 업무수행 능력 자체가 고민의 본질이었다면, 관련된 책들은 이미 다 읽고도 남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요. 고민의 대상이 방향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기획을 해야 하나, 어떻게 일을 삶에 녹여낼 것인가 하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요. 이럴 땐 아무리 유익한 글, 아무리 대단한 책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번 봐야겠다'하고 스크랩이라도 해두면 다행이지요. 물론 스크랩해 둔 아티클들을 다시 꺼내 읽는 일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 방법론을 이야기합니다. "OO 하는 다섯 가지 방법", "OO의 세 가지 유형", "~하지 말고 ~ 해라", "OO 하는 5단계 접근법" 같은 콘텐츠들이 주를 이루지요. 매체도 정말 다양하고요. 퍼블리, 요즘IT, 서핏 ... 이런 아티클들의 도움을 가장 피부로 와닿게 받았던 때는 처음으로 웹 기획을 할 때였습니다. WBS, 화면설계서, 기능정의서, IA(정보구조도) 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때, 개념을 잡고 실제로 문서를 작성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었지요.
그러나 방향성을 점검할 때는 와닿는 콘텐츠들이 많지 않더라고요. 무엇인가 뚜렷한 목표를 위한 성장이 아니라, 성장 그 자체에 매몰되어 '성장을 위한 성장'을 노력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기획의 목표와 성장의 방향성이 부재했던 거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저는 지속가능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재미가 없으면 저 스스로 지속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재미에도 중요도를 크게 둡니다. 마케팅이나 기획 영역에서 모르는 용어들을 익힐 때도 그랬지요. 회의에서 처음 듣는 용어들이 난무하고, 그것을 검색해서 알아보는 과정. 그나마 애자일 같이 동음이의어가 없는 경우는 다행입니다. '린하게'는 무어라 검색해야 할지도 참 난감했지요. 얼라인을 위한, 알앤알, 이번 소재 로아스가 어쩌구. 사실 꽤나 싫어하는 소통방식입니다. 그분들 표현으로는 '컴'이겠네요. 커뮤니케이션의 '전문용어'입니다. 하하.
전문가만 알아듣는다고 다 전문용어는 아니지요. 이런 류의 학습을 하다 보면 현타를 만나는 순간이 두 번 옵니다. 학습할 때 한 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저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기획자라면, 특히 경험을 다루는 기획자라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처럼 될 수 있거든요. 로고 디자인 회사의 로고가 정말 촌스럽다거나, 글을 쓰는 직무의 자기소개서에서 글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네이밍 전문 브랜드 이름의 식별성이 너무 떨어진다거나.. 경험 디자인을 하는 사람의 이메일이 읽는 사람의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 그 또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아무튼, 방법론 중심의 성장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기획은 멋들어진 스킬셋으로 꾸며진 화려한 직무능력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 기획이었으면 했거든요.
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갖기로 했을 때부터, 의미 있는 경험들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부터 제대로 해야겠지요. 의미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 지금은 흘러 흘러 사용자 경험, 고객 경험을 다루는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합니다.
"고객관점이라는 시각 자체가 철저하게 기업관점의 생각일 수도 있겠다."
기업이 규정하는 고객경험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궁극적으로는 매출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용자들이 더 편안하게 서비스를 경험하게 해 주고, 무언가 특별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브랜드에 친밀감을 느끼도록 하는 이유가 결국 그것이 매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거나, 돈을 벌어야만 유지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기업의 이익을 위한 활동이라고 해서 의미 있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업의 이익을 노리면서도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지요.
다만, 고객경험을 위한 노력들이 다소 단기적이거나 미시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합니다. 고객이 읽기 편한 안내 메시지, 사용하기 편한 버튼 위치나 텍스트, UI/UX 설계, CX관리.. 각각의 담당자들은 다들 고객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유입량을 늘린다거나, 클릭률을 높인다거나, 매끄러운 여정을 통해 불필요한 체류시간을 줄인다거나.. 고객을 편하게 해 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게 정말 고객관점일까요? '고객은 이런 것을 원할 거야'라는 기업이 생각하는, 기업관점의 고객관점은 아닐까요?
고객 여정이라는 말을 썼으니, 여행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좋았던 여행의 순간'하면 어떤 신사분이 할로우 바디 기타를 여유롭게 연주하고 있는, 베네치아의 골목길 사이 작은 광장이 떠오릅니다. 제게 꽤나 의미 있는 경험, 의미 있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연주는 투박했지만, 저도 언젠가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경험들은 이런 순간들입니다. 기차역의 완벽한 키오스크, 언어가 낯설어도 이해가 잘 되는 숙소 안내문이 아니라요. 기획자 분들이라면,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경험디자인이 혹시 이런 쪽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기차역 키오스크가 불편하면 고쳐야지요. 숙소 안내문이 숙소 이용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면 개선해야지요. 하지만 그것은 불편을 최소화할 뿐입니다. 최적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최적화로는 감동을 주거나 의미를 남기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두 개는 별개로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요.
사용성이 아주 좋았던 스위스의 지하철 어플은 제게 어떤 의미도 남겨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썰매가 없으면 아주 불편했던 스위스 작은 마을은 오히려 인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져도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스키를 탄 사람들이 보드를 탄 사람들을 끌어주고 있었거든요. 저도 언젠가 보드를 매고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하철 한 칸이 클럽이면 좋겠다는, 정신 나간 상상을 가끔 하는 편입니다. 최근에 퇴근길에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원버스 안에서, 한 자리쯤은 블루투스 마이크가 있으면 어떨까 했습니다.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있잖아요. 한 명쯤은 퇴근길 버스킹을 해줘도 좋을 것 같아서요. 버스킹에 대한 로망도 조금 이뤄보고, 매일 듣던 노래 말고 누군가 불러주는 노래로 퇴근길을 함께하는 것도 이색적일 것 같지 않나요? 노래가 서툴면 좀 어떻습니까, 같이 한 번 웃을 수 있다면 더 좋잖아요. 요즘 같이 흉흉하고 예민한 세상이라면 더더욱이요.
또 이상한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경험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기획을 찾아가는 중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지인이 공유해 줘서, UX심리학 스터디모임을 발견했습니다. UX와 관련된 OO법칙, OO효과들을 총망라하는 스터디인 것 같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실무에서 누군가를 설득할 때 사용한 적도 없고요. 대신 그런 법칙이 왜 생겼는지,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그런 효과들은 어떤 식으로 검증되었는지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략적으로라도요.
본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피츠의 법칙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알아야 응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실 '법칙'은 현상 묘사에 불과하기도 하거든요. 어감이 왠지 절대 진리인 것처럼 오해하기 딱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리학 지식보다는 심리학의 사고방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아는데서 그치기 쉽지만, 그것을 지혜로 활용하려면 사고방식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심리학을 전공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지인들이 많은데요. 막상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심리학을 잘 써먹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저도 후배들에게 대학원은 추천하지 않는 편이지만, 경험을 기획하는 관점에서 일할 때는 심리학만큼 도움 되는 전공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애증의 전공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