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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설게하기 Dec 18. 2020

예체능을 하며 산다는 것

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네가 꼭 해줘야 할 게 있다”



 아빠가 이런 말을 하면, 요청을 듣기 전부터 왠지 귀찮아지고 거절부터 하고 싶어진다. 아빠는 카톡으로 집 근처 공원과 호수에서 찍은 100장도 넘는 풍경 사진과 그 풍경 안에서 양팔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자신의 셀카, caro mio ben 피아노 곡 음악 파일, 긴 편지 같은 글을 순식간에 전송하며 말했다. 

 


“영상 만드는 딸내미 둬서 뭐 하냐. 내일까지 하나 만들어라”



 영상에 필요한 자료를 미리 다 구해놓고 차마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치밀함과 오늘 요청해놓고 내일까지 만들어내라는 무례함. (역시 우리 아빠 !) 하지만 아무리 가족의 요청이라도 무급으로 하는 일은 너무너무 귀찮으니까 발꼬락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빠가 보내준 글부터 읽어보았다. 



우리 나이에 예체능을 하며 산다는 것, 전업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요?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우선이었으니까요. 열심히 정년까지 앞만 보고 일했습니다. 

그 유명한 58년 개띠로 태어나 정년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많이 공허해지네요 ~


 

“아빠 ~ 58년 개띠 문장은 삭제해도 돼요? 너무 식상하고 꼰대 같아요”

“그래, 맘대로 알았다”



다시 글을 읽었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꿈들이 있었겠지요? 

정말 해보고 싶은 성악을 시작해 볼 수 있어서 소원 풀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귀에 이어폰 끼고 동네 호숫가를 돌며 목청껏 소리 지르며 폼 잡으면 내가 그 유명한 김파로티가 되는거지요 ~ 



“아빠, 학예회 같은 거 해요?”

“그래, 발표회 하는데 내가 노래 부르기 전에 나올 영상이야”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화장실에서 거실에서 안방에서 안 그래도 큰 목소리로 매일 “세뇨~~~~~”하며 소리 질렀는지를. 엄마가 말씀해 주시길, 몇 달 전부터 무료 성악 프로그램을 신청해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하고 있고 며칠 뒤 발표회가 열리는데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요청을 승낙했다. 왠진 모르겠지만, 아빠가 보내준 글에서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꿈들이 있었겠지요?' 이 문장이 이상하게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32년 동안 한 직장에 머물며 자동차를 수리하고 점검하던 사람의 꿈이 성악이었다는 것을 32년 만에 처음 알았다. 

그래, 예체능 하는 딸내미 둬서 뭐하누. 이럴 때 써먹지. 



 아빠에게 받은 A4 2장 분량의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글을 간단히 몇 문장으로 요약하고 깔끔한 폰트와 레이아웃을 맞춰 자막을 만들고 bgm으로 피아노 곡을 잔잔하게 깔고, 보내준 100장의 사진 중 베스트 컷 10장 정도를 추려 지루하지 않게 살짝 움직임을 주었다. 그리고 영상을 다 본 후 아빠의 공연에 기대감을 심어줄 장면으로 영상을 마무리했다. 사실 나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라 한 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빠를 방에 불러 완성본을 보여드렸다. 만족을 한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반복해서 다시 영상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에게 파일을 전달받은 후에도 거실에 있는 데스크탑을 이용해 봤던 영상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또 봤다. 심지어 다음날에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학교 동창회 카페에 그 영상을 올렸고 여러 명의 동창생들로부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Re: 두석이 너 임마. 네가 언제 한번 큰일 낼 줄 알았다 임마 ~

Re: 두석아 임마 ~ 송미가 만든 거 맞지? 딱 티난다 ! 

Re: 두석아 정말 멋지다 ~~~~



 아빠는 댓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만큼 짜릿한 일도 없지. 아빠나 나나 똑같네.   


너무 좋아하는 두석의 모습



“와하하하하. 들통났네. 들통났어. 딸이 영상 만든 거 들통났네 ~ 전문가의 냄새가 난다나 뭐라나 ~”

“그럼 ! 누가 만들었는데. 그러니까 나한테 잘하세요. 이제 발표회에서도 난리 날 걸 !”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져서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와 언니가 거실로 나와 케이크에 초를 꽂으려 하고 있었다. “오늘 누구 생일이야?”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초에 불이 켜지고 모두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 생신 축하합니다 ~” 


나는 그날이 아빠 생일인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빠는 초를 끄고 나를 보며 말했다. 

 

“송미야, 생일 선물 고맙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그날만큼 내 영상기술이 유용하게 느껴진 날이 없었다.  

최고로 가성비 좋은 효도와 의뢰인이 하루 종일 돌려 볼 정도로 만족하는 영상,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다니. 

오랜만에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차올랐다.  



 내 비록, 나를 먹여 살리느라 예체능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빠를 발판으로 배운 예체능이지만 결국 아빠를 기쁘게 해준 것도 영상 기술, 예술 해서 어떻게 먹고살겠냐며 회의 적이었던 아빠의 삶에 활력을 넣어준 것도 성악. 


예체능 분야가 밥이 되진 못해도, 밥맛 나게 하는 요소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 예체능이 얼마나 이렇게 유용한데! 



 P.S. 김파로티님 첫 공연 축하해요 ~ 발표회 잘 하시구요 !

그리고 심화반은 무료 말고 유료 결제 어때요? 


김파로티의 오프닝 영상 (사실 별건 없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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