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수의 하소연 에세이
SH와 하우스 메이트가 되는 일은 나에게 꽤 특별한 일이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내가 목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정갈하고 고즈넉한 공간에서, 건강한 재료로 만든 그림 같은 플레이팅의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SH는 내 마음속 '카모메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 같은 존재였다. 도시 생활의 염증을 느낄 때,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시골 마을의 소박한 식당에서 요리를 하며 사는 삶.
그런 판타지를 실제 삶으로 실현하고 있는 SH와 한집에 살 게 되며 알게 된 사실은, 첫 번째 식당 하나를 운영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과 두 번째 마냥 한가해 보이는 지역살이가 (어쩌면) 서울보다 훨씬 더 바쁘게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재료를 사고, 제철 과일로 수제 청을 담그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사람을 접대하고, 정산하고, 직원들의 교육과 점심 식사를 챙기고, 매달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레시피를 연구하고, 거래처에 넘길 두유 요거트를 만들고,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시대 감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른 지역을 답사하고, 홍보를 위해 가끔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거나 로컬 매거진으로 부터 청탁받은 원고를 쓰고, 한 달에 한번 요리 워크숍을 열고. 이 모든 게 SH와 동업자 MJ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모든 걸 소화했기 때문에 최소한끼가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저녁 9시만 되면 온 동네가 고요해지는 이곳에서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자신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24시간이라는 거대한 빈칸을 능동적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런 그녀 곁에는 안나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올라프 같은 JE가 있다. JE는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최소한끼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한다. SH의 소개로 알게 된 그녀는 목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말투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만,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감각이 뛰어나 유행에 민감한 서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탁월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숏컷 머리에 단정한 무채색의 옷차림이 주는 차분한 분위기와 미스메치 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함께 들을 때면, 영화 '코리아'에서 탁구 선수로 나온 배우 한예리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과 커피프린스에서 고은찬이라는 캐릭터를 접했을 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동시에 들었다.
경찰 시험을 준비하다 갑자기 빵과 커피를 배워야 되겠다고 다짐한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박카스 청년' 같은 사람이다. 내가 관찰한 JE의 일상은 대략 이렇게 흘러간다. 아침 9시 30분부터 1시 까지 최소한끼에서 오전 아르바이트를 한다. 가게 문을 열며 화장실, 주방, 식탁 등을 청소한다. 워낙 깔끔한 성격의 사람이라 사장님 SH에게 꼼꼼하게 청소하라며 오히려 나무라기도 한다. 손님이 오기 전, 어제 제과제빵 학원에서 배운 베이글을 반죽해 오븐에 넣어둔다. 손님들이 물밀듯 들어오면 단정하게 주문을 받고, 서빙하며 이동하는 중간중간 베이글이 잘 구워지고 있는지 힐끗 오븐을 훔쳐보기도 한다. 가끔 허둥지둥 대다가 그릇을 깰 때도 있는데, 유일하게 사장님의 눈치를 살짝 보는 구간인 듯 하다.
2시쯤 스탭들과 늦은 점심 식사를 차린다. 다정한 SH은 근처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종종 초대해 주기도 하는데, 번번이 미안해하는 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크림치즈'를 사달라고 부탁한다. 식탁에는 구운 야채들을 섞어 만든 파스타와 JE의 베이글, 쪽파와 상큼한 레몬즙을 섞어 만든 SH표 크림치즈도 올려져 있다. 베이킹에 전문적인 SH와 마을 사람들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시식하며 JE에게 작은 충고와 격려의 말을 해준다. 평일에는 제과제빵사 자격증 책을 들고 다니는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라 산책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늘 책을 곁에 끼고 다닌다. 장난 잠아 문제지에 있는 기출문제를 불시에 물어보기도 하는데, “60점만 넘기면 된다니께요! 저는 실전에 강해유” 하며 발끈한다. 종종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 2시간을 이용해 '커피와 사색'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잔잔한 음악을 틀고, 향을 피우고, 신선한 원두를 갈아 잠시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백의 시간을 제공한다. 커피 주문 방법도 특이하다. 자신이 직접 찍은 파도, 숲, 건물의 사진 중 하나를 고르게 하고 그 풍경과 어울리는 맛의 원두를 내려준다. 마무리는 식당과 5분 거리에 있는 마카롱이 맛있기로 유명한 빵집에서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가는 자신의 일상을 딱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미안!) 블로그에 정성스럽게 정리해 놓는다. 종종 JE의 블로그에 들어가 게시물을 구경하는데 타인의 일기장 훔쳐보듯 재미가 쏠쏠하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다짐을 그곳에 적어 놓곤 한다.
나중에 백발이 되면, 손수 뜨개질한 모자를 쓰고 (빨리 뜨개질 배워야 해) 빨간머리 앤에 나오는 커스버트 남매처럼 빵을 굽고 아침 식사를 하고 텃밭을 가꾸고 남을 도울 때 헌신적으로 몸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JE의 블로그의 글 中
인터뷰 촬영을 하면서 만난 온갖 권위 있는 철학자, 인문학자, 교수, 연예인, 베스트 셀러 작가들의 멋진 말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JE에게 가장 큰 자극과 영감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녀의 24시간은 빼곡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인다. 세상에 가장 유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어려운 걸 그녀가 해내고 있다.
이따금 삶의 의욕이 떨어질 때, 오픈 전인 최소한끼에 들려 노트북을 펼치곤 한다. 점심 장사를 위해 야채를 다듬고, 식물에 물을 주는 SH와 그 옆에서 부지런히 보조하는 JE를 손바닥에 턱을 괸 자세로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가게 안 선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픈 준비를 마친 JE는 그 선반에 잠깐 들려 드립 주전자, 포트, 서버 등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자신만의 각도를 맞춘다. SH가 JE을 위해 한 칸 내어준 작은 선반. 그곳에는 '커피와 사색'에 필요한 물건들이 소중한 보물처럼 놓여져 있다.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네가 원하는 걸 시도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것도 SH의 아이디어였지.
그 둘의 조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녀들의 소음이 만들어내는 합주곡에 흠뻑 매료당해, 나도 모르는 사이 커서만 깜빡였던 워드 속 빈칸에 글자가 가득 새겨진다.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글도 아니고, 이 글이 과연 어딘가에 출판이 될 수 있을지도 이제는 미지수이지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진심을 다해 적어 내려간다. 글을 다 완성한 후 최소한끼 앞에 세워둔 초록색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는다. 딱히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바퀴가 굴러간다는 것. 힘차게 페달을 밟다 운 좋게 만난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만들어주는 바람을 느끼며 그동안 잠시 잃어버렸던 삶의 생생한 감각들을 흔들어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