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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Oct 25. 2023

풍경이 행복입니다

                                                                                                                                                         2023. 6. 2. 


   한 번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때 잠시 멈춘다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닙 니다. 회사에서 한 번 탄력받은 업무를 ‘내일 해야지’라며 중단하고 퇴근하기보다는 야 근을 해서라도 끝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아무리 졸 음이 쏟아지고 배가 고파도 눈앞에 보이는 휴게소에 어디 쉽사리 들어가지던가요? ‘조 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일단 도착부터 하자’는 생각이 앞서는 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엊그제부터 제주 올레길을 걷고 있습니다. 운동을 잘하거나 체력이 좋지는 않지만, 그저 걷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주일이 넘는 혼자만 의 여행을 허락하여 주신 은혜로운 아내님은 나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즐겨요, 걷다가 카페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바다도 보고~” 


  그리고, 4일 차가 된 오늘에서야 아내의 그 당부를 실천하는 중입니다. 사실 지난 3 일간은 걷기만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스마트폰의 지도를 따라 열심히 걸었습니 다.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었습니다. 아니, 목적지를 목표로 열심히 걸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위해,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일상이었 습니다. 올레길의 각 코스는 통상 4~6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걷 는다면 점심 어간에는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저는 하루의  여정을 오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남는 시간 에 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걸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려면 숙소 예약도  취소해야 하고, 위약금도 발생하니 그럴 수도 없었지요. 하릴없이 숙소 주변의 동네를  배회하다가, 숙소에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이 오후의 일과였습니다.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나섰고, 풍경 또한 어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시 간쯤 해안 길을 걷다 보니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바다의 풍경이 왠지 새롭게 느껴 졌고,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과 아내의 당부가 떠오르는 것이었 습니다. 마침 눈앞에는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가 있어 용기를 내어 걸음을 멈추었고, 전망 좋은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풍경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새파랗게 눈 부신 하늘, 그 하늘 끝에 맞닿은 바다, 그 바다가 나에게 끝없이 보내는 파도, 그리고  그 파도가 내 눈앞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연주하는 하모니까지. 


‘좋다. 참 좋다. 이렇게 좋았던가!’  


  한참을 바라보며 풍경에 감동하였지만, 아직은 목적지 도착이 우선이라는 마음이 컸 는지 커피잔을 급히 비우고 막 일어서던 찰나에 ‘딩동~’ 문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기가 너무 아쉬워서 제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전송했던 풍경  사진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귀는 저를 다시 자리에 주저앉혔습니다.


“풍경이 행복입니다” 


  행복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열심히 걷는 것,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뭐가 중할까요? 원효대사의 해골 물이 제게도 찾아왔네요.


   존재(存在)의 부재감(不在感)이랄까요? 항상 곁에 있기에 오히려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풍경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항상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너 무나 익숙해서, 너무나 흔해서 그 존재를 쉽사리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치열한  일상, 아니 우리 스스로가 경쟁적으로 치열하게 만들어 버린 일상에 몰두하다 보니 언 제나 내 곁에 존재하는 풍경은 쉽사리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보내준 진리의 글귀 덕분에 다행히도 저는 그 감각을 조금은 회복했네요. 


  그렇게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풍경은 움직이 는 사람에게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항상 우리 주위에 존재하 지만, 또한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풍경을 제대로 만나려면 우리 자신 역시 그  자리에 멈춰서야 합니다. 잠깐 멈춰 서는 것을 저는 왜 이리 두려워했을까요? 지금 내  눈앞의 행복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죠. 남보다 뒤처질까 봐 걱정되었겠죠. 인생을 멀 리 보면 오십보백보요, 도토리 키재기이며, 도긴개긴이라고들 하지만 지금 내 위치에 서의 경쟁의 뒤쳐짐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하네요. 하지만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그 용기가 우리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더 풍부하게 만듦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저도 이곳을 떠날 테고, 아름다운 올레의 풍경은 희미해질 것이며, 삭 막한 현실 속으로 복귀하여 빠르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전보다 조금은 더 행복하 지 싶네요.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행복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관한 또 하 나의 방법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잠깐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세요. 

여러분을 둘러싼 모든 것이 풍경입니다. 

         

그리고, 

                 

풍경이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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