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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Nov 04. 2023

나의 영원하신 기업

2023. 7. 17.


  성경은 그 속에 진리와 복음의 비밀을 담고 있는 참 좋은 책이지만,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책의 상당한 두께부터 시작해서, 2단으로 나뉘어 촘촘히 인쇄된 작은 글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도 얇은 종이는 우리를 압도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모친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나같은 사람조차도 성경 읽기가 부담스럽다. 


  분량만큼이나 성경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단어’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글을 읽는데 단어가 무슨 문제가 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의 단어는 우리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난해한 것들이 많다. 어린 시절 주일 낮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하시던 장로님이 생각난다. “천지를 하감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며, 권능이 한량 없으시며...”. 이건 뭐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단어들 아닌가. 명절날 온 친척이 모여 예배드리던 시간 할아버지의 기도 또한 기억한다. “~ 우리는 죄인이올시다.” 세상에, 글에서만 읽었던 ‘올시다’라는 단어를 내 귀로 듣다니. 


  이처럼 성경의 단어들은 어렵지만, 그만큼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국어 시험에서 98점이라는 훌륭한 점수를 받았던 나는 의기양양하게 시험지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쉽게 놓친 2점짜리 주관식 문제는 <첩경의 우리 말을 써라> 였고, 나는 쿨하게 답안지에 '잘 가라, 2점'이라고 적으며 시험을 마무리했다. 이를 본 어머니는 성경을 펼치셨고, 잠언 3장을 읽으라 하셨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3:15-17)      


그 외에도 잠언 속 '첩경'이 담긴 여러 구절을 보여주며 어머니는 물었다. “무슨 뜻인 것 같니? 3글자로 된 우리말이야”. 아하! 지름길이구나. 


이후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손자들과 잠언을 읽으면서 – 거짓말 조금 보태면 – 100번정도 이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나를 이렇게 부른다. 


"어이, 잘가라 2점" 


존귀하신 아버지를 어찌 그리 경박스럽게 부르냐고 지엄하게 반박해보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아이들의 언어 세계가 확장됨을 목격했는데 어찌 불역열호(不亦說乎).          


서론이 길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의 영원하신 기업> 찬양이다. 주와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주께로 가까이’하고자 하는 솔직한 마음, 나와 동행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인간적인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 하지만, 첫 소절인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는 조금 부담스럽다. 많은 찬양 가사에 ‘나의 생명을 드리니’, ‘심장을 바치옵니다’ 등 내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나타나지만, 과연 나도 그런가라고 생각하면 모르겠다. 아직 아닌 것 같다. 


Anyway, 

최근 출판된 성가곡집에 <나의 영원하신 기업>을 참 좋게 편곡한 버전이 있어 요즘 자주 듣고 있다. 무엇인가에 몰두하다 보면 그것의 세부적인 것까지 관심이 가게 마련이듯, 그리고 찬양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천착하게 마련이듯, 첫 소절의 ‘기업’이라는 단어가 유독 나를 사로잡았다. 해리포터 1편 전반부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알 수 없듯이, 전제(前提) 없이는 본론이 이해될 수 없다. 그 때문인지 ‘나의 영원하신 기업’의 ‘기업’이 무슨 의미인지를 개념화하지 않고서는 이 찬양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구체적인 탐색을 시작했다. 솔직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정확히 알기보다는 적당히, 막연히 아는 척하는 잔기술이 생긴다. ‘기업’이라는 단어도 그러한 것이라는 부끄러운 사실이 무척이나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기업(基業): 기초가 되는 사업,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     


회사를 뜻하는 기업(企業)과는 달리, 터 기(基)자를 사용하는 단어로 삶의 터전이자 유산이라는 의미를 갖는 ‘기업’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자녀는 여호와의 주신 기업(시편127:3)’, ‘…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예레미야 애가 3:24)’ 등의 구절을 통해 ‘기업’은 무엇인가 물려받는 것, 유산이라는 개념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은 구절, 여기서 나는 ‘기업’의 확실한 개념 – 적어도 나에게 있어 ‘기업’이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는 - 을 찾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수기 18:20)     


선민(選民: Chosen people) 중에서도 구별된 레위인의 직무와 책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중 한 구절이다. 다른 열 한 지파에게 땅을 나눠준 것과 달리 하나님은 ‘너희에게 줄 땅은 없어, 하지만 나를 가져’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읽힌다. 이는 단지 레위지파에만 해당되는 과거의 역사를 넘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 즉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을 경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많은 월급, 좋은 집, 고급 자동차는 물론이요, 높은 직급, 사회적 인정과 신분, 인기를 갈망하며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런 글이나 쓸 때인가’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 것 - 명예, 제물 – 들은 너에게 준다고 장담 못해. 하지만 너는 나를 가질 수 있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너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네 것이기도 해. 나를 가져.”     


그러고 보니 이미 이런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분들의 찬양이 꽤 여러 곡 생각난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하지만 내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길 바란다. 포도 열매는 씨알이 굵고, 논밭은 풍년이며 우리엔 양과 소가 가득 찼으면 좋겠다. 


‘금과 은 나 없어도…’ 


금도 은도 다 가지고 싶다. 이 속물을 어찌해야 하랴.      


유독 유한한 것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답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어찌할까. 그럼에도 막연히 – 성도가 자꾸 막연함, 적당함에 빠지면 안되지만 -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찬양, 그리고 그 의미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 잡았으니 한동안 내 생각을 지배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금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 생각 역시 내가 지어낸 소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이기를 바래본다.     


“‘주께로 가까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적인 마음이야. 물론 그러한 노력과 마음이 기특하긴 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내가 너에게로 가는거야. 지금 갈테니 나를 가져.”


https://www.youtube.com/watch?v=z1ApRuIVBIo&list=TLGGMd0-l7eP7GgzMTEwMjAyMw&t=1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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