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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땅별 Nov 03. 2024

무제

우리는 타인을 함부로 훈계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각자가 각자만의 방식으로 제각각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만의 해석본이 정답이라고 믿으며 남을 판단한다. 자신의 믿음이 확고할수록 남의 영역을 불쑥 침범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확신하며 타인의 상태는 시정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 타인이란 교정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것이다. 참으로 오만하게도...


나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타인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소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가? 애당초 정상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세상을 살아오며 느꼈던 것은 제각각 정도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 뿐 다들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함의 정도가 높을수록 유별나다고 불리며 교정해야 할 대상, 시정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그들을 교정하려고 하는, 소위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조차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이란 기준 자체는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모호한 개념이었고 정상은 표준이 아닌,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살아가도록 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사람들은 어떤 확고한 믿음 같은 게 있는 듯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유일한 정답이 있는 듯이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며, 경기장 라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타박하고 재빨리 라인으로 되돌아오도록 채근한다. 한때 나는 이것에 대해 반항했다. 왜 내가 스스로 라인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대해 훈계하냐고. 나는 나만의 인생을 살 자격이 있다고. 나의 정체성, 나의 삶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고 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태도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연민의 대상, 이해해줘야 할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훈계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면서 나를 함부로 대우했다. 심지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선 사랑이었다. 나는 이것이 몹시도 싫었다. 그들의 사랑은 폭력이었고, 시혜였으며,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관용이었다. 나는 약자가 아닌데도... 나는 그저 나인데도...     


그렇게 나는 자기만의 성벽을 쌓고, 사람들을 멀리했다. 나를 이해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 가시를 세우고, 울분과 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더 몰이해의 대상이 되었다. ‘저 자식 왜 저래?’와 같은 말과 그들의 냉소 가득한 시선을 응시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체념한 것이다. 아니, 체념이라기보다는 나는 나를 비로소 존중하게 된 것이다. 나를 더 이상 학대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았으며. 남들과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특별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나였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남들이 나를 멸시해도, 나는 그저 나였다.     


나는 그렇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침묵은 죄악이라고. 저항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그러나 왜 저항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냥 죽은 채로 살면 안 되는 걸까? 침묵하고 조용히 사는 인생이 왜 죄가 되는 것일까? 인생 자체를 졸렬하게 살든, 당당하게 저항하든 각자가 택한 것이지 않은가. 누군가의 선택을 나무랄 자격이 우리에겐 있는 걸까?     


삶은 결국 각자가 선택하고 각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결국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저항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훈계할 필요도, 강요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알아서 그 길을 걷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걷는 이들은 스스로를 자학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면서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든, 괴롭든, 슬프든, 눈물 나든 간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눈물 나게 힘들기에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포기하면 그대로 사회부적응자가 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본인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에게 주어진 생의 무게인 것이다.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욕받는 게 일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살아야만 하는 게 인생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걷다 보면 타인을 충고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조금 더 유연하게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을 비로소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애써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애써 타인과 다른 삶을 살려고 바둥거릴 필요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묵묵하게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살다 보니 살아지는 것이다... 살다 보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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