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디 Aug 23. 2023

밤바람에 와인 한 잔

10년 전 보르도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는, 로제 와인을 책상에 두고 이따금씩 따라 마실 만큼 (심지어 아침에도) 와인을 좋아했다. ‘보르도’에 살게 되었으니, 와인을 더 마셔보자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지금은 와인의 고장에 살지는 않지만,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산지의 와인을 구경하는 건 여전히 즐겁다. 와인에 문외한인 나는 마트의 진열대를 가득 채운 와인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라벨이 마음에 드는 와인을 골랐는데, 그렇게 집에 가져온 와인의 맛을 확인하는 건 일상의 작은 재미이기도 하다.


요즘은 나이가 든 탓인지 와인 한 두잔에도 속이 안 좋을 때가 있어, 전만큼 와인을 마시지는 못한다. 그래도 오래된 벽돌집과 가로등이 보이는 창문으로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올 때면, 식탁 위에 와인 한 병 세워놓는 그 정취가 좋아 와인을 꺼낸다.



안주로는 마트에서 산 치즈나 동네의 정육점에서 산 반건조 소시지를 곁들인다. 혼자 먹을 때에는 치즈의 포장 위에 바로 잘라 먹지만, 누군가와 함께일 때는 색감을 돋우기 위해서 이케아에서 산 나무 도마에 올려 향신 채소로 장식을 한다. 짭짤하고 진한 소시지에 묻혀 별 향이 나지는 않지만 초록이 얹어진 것만으로 맛과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은 동네의 주말 시장을 구경하다가 치즈를 사온 적이 있다. 시장 분위기가 좋아서 들렀던 건데, 치즈를 파는 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시식 공격에 결국 마트에서 살 때보다 세 배는 더 비싸고 커다란 치즈를 사왔다. 그 치즈를 빵, 와인과 함께 야금야금 먹을 때마다 그 날 일을 이야기하며 깔깔깔 웃곤 했다.



리슬링 와인을 부어서 만든 홍합찜도 와인에 약한 쟈키와 내가 와인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요리에 넣을 와인과 식탁에서 마실 와인을 꼭 구분했다. 저렴한 와인은 확실히 맛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2-3만원을 하는 와인을 요리에 넣기는 아까우니, 만 원 밑의 싼 와인으로 봉골레 스파게티 같은 요리를 만들고 마실 용도로는 그보다 좀 더 비싼 와인을 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4 유로 정도면 충분히 맛있는 와인을 구입할 수 있으니, 마실 와인과 요리 와인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특히 홍합찜은 홍합, 버터, 샐러리, 화이트 와인만 넣으면 되는 간단한 요리라서 더욱 와인의 역할이 큰데, 쟈키는 꼭 알자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리슬링 품종의 화이트와인을 넣는다.


프랑스의 와인들은 생산지나 품종에 따라서 와인병의 규격이 정해져 있는데 알자스의 와인은 보통의 화이트 와인보다 병목이 더 길고 병의 지름이 더 작다. 족히 백가지는 넘을 투명한 초록색 병들 사이 사이에 숨어있는 길고 우아한 알자스 와인을 고르는 일은 홍합찜을 만들 때마다 찾아오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다.

당도가 높은 리슬링 와인을 홍합찜에 콸콸콸 따라붓고는, 남은 와인은 요리를 기다리며 홀짝홀짝 마신다. 그럼 홍합찜을 먹을 때에는 짠을 하고 두, 세모금이면 다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양이 남는데, 밥을 먹기 시작하면 술 마시는 걸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 양이다. 


글을 쓰면서 홍합찜에 알자스 와인을 넣는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아무래도 이게 정론이 아닌 듯하다. 맛으로 따지자면 달지 않은 (Vin blanc sec), 지역으로 따지면 부르고뉴, 그 중에서도 무스카데와 샤블리를 추천하는 레시피가 대부분이다. 쟈키가 참고한 레시피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홍합찜을 만드는 날이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만의 전통을 따른다는 게 좋다.


마치 이 글을 위해 찍어놓은 것 처럼, 알자스의 리슬링 와인 라벨이 선명하다


2021년, 대학원에 막 입학해 프랑스에 왔을 때 상세르 (Sancerre)로 여행을 갔다. 나에겐 이름마저 생소한 곳이었는데, 프랑스 중부를 흐르는 루아르 강 근처의 화이트 와인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도시는 높은 고도에 마치 산성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 숙소에서 돌담을 따라 시내로 올라가는 길에 포도밭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낮에는 전기 자전거를 타고 구비 친 언덕을 올라 포도밭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고, 저녁에는 시내의 와인바에 가서 상세르의 와인을 마셨다.


4, 5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여행이 너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와인 메뉴에 상세르가 보일 때마다 혼자서 반가움을 느낀다. 포도가 자란 밭과 그곳을 걸었던 무더웠던 날을 떠올릴 수 있는 와인이 있다는 건 상당히 낭만적인 일이다. 




파리에 사는 것만으로 와인에 대한 지식이 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와인이 있는 추억은 노력 없이도 차곡차곡 쌓인다. 누구나 좋아하는 와인 하나쯤은 생기고, 와인이 곁들어진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겨나는 곳. 프랑스에 와인은 어디에나 있고, 프랑스를 머물다 가는 모든 이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