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내용
이상하게 저는 로맨스가 좋더라고요.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간식을 나눠주다 감정이 싹트거나,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다가 인연이 된다거나, 학생증을 버스에 두고 내렸는데 그걸 주려고 따라 내렸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요.
실제로 저에게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를 봐도 로맨스 혹은 치정극이 더 몰입이 되더군요. 작년과 올해를 통틀어 가장 감명 깊었던 드라마는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와 지금 방영하고 있는 ‘바람이 분다’ 예요.
가슴 아파하고, 걱정하고, 참지 못해 돌아서 잡고.. 어떤 사람은 신파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신파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신파는 없앨 부분이 아니라 변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말씀하시더라요.
저도 이 부분에 동의합니다. 이유는 실제 우리네 삶이 드라마나 영화처럼 깔끔하고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쿨한 건 없어요. 그런 척하는 거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도 허구이고,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도 허구이기에, 판타지물을 보지 않는 건 오히려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기회를 닫고 있는 거라고 조언해준 분이 계셨어요. 그날 저는 ‘반지의 제왕’을 패키지로 결제했고요. 1편을 1시간 남짓 보니 도저히 못 보겠더군요. 껐습니다.
네, 극사실주의입니다. ‘가정(supposi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에 있을 법한 허구는 만약을 가정해 삶을 돌아보고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판타지물이 그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서사를 통해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의 교훈이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세계관과 여러 장치들이 저의 몰입을 도모해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결국 취향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취향은 내용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형식’에서 먼저 필터링됩니다. 내용과 상관없이 사실극이냐 판타지냐에서부터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영화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 간의 소통에도 형식이 맞지 않아서 내용 듣기를 거부하거나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부의 이혼 사유 44%가 성격차이였는데, 막상 그 속내를 들여다봤더니 결국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였습니다(ebs다큐프라임). 연인 사이라고 다를까요?
이왕이면 도구가 동일한 연인을 만나는 게 좋겠죠. 가장 쉬운 도구는 대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글이 편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말없이 필요한 걸 툭 던져주고 가는 행동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나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헤어져야 할까요? 서로의 도구를 이해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도구 사용법을 배울 필요도 있습니다. 마치 외국인과 연애를 하는 것처럼요. 의사소통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인 것이죠.
한국에 많은 외국인들이 있듯이 그만큼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이 있습니다. 도구가 바뀌기 어려울까요? 내용이 바뀌기 어려울까요? 단연 내용입니다. 도구가 맞지 않고 서툴러도 내용이 예쁘다면,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함께 노력해주세요. 언젠가 좋은 영화 한 편 만들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