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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정민 Jun 27. 2023

진보의 확대와 보수와의 공존전략

 현 정부의 임기가 시작된 이후 이해하기 힘든 국정이 반복되었다. 인사에 있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인사들이 돌아와 ‘윤핵관’으로 불리며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무엇이 통(通)하기에 이들은 한 배를 탔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공통점이 있었다. 국정을 꿰뚫는 철학이 없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보수진영이 늘 그래왔듯 역시나 ‘이익공동체’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개인의 역량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진보의 확대를 위한 대안이다. 시장분배에 대한 개입 방법 중 하나로 개인의 분별력을 키운다는 맥락으로 한 얘기지만, 결국 의식적 지적으로 성숙된 개인들이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킨다는 맥락에서 뜻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진보의 미래, 259-260쪽)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2회 수상자인 재미언론인 강형원 기자는 지난 5월 9일(2023)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의 ‘좋은 기사 연구 모임’에서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강연 일부 발췌이다.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계속 정치·사회적인 역사 교육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그것을 현재 정치상황에 적용해 분석하는 것, 그런 지식을 총정리해서 이 사회에 “쏟아내는 것”이 언론의 역할입니다. 설령 학교에서의 교육이 부족했더라도, 언론이 메워줄 수 있는 것이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3.6월호 101쪽)

 

 대안은 미디어이다. 강형원 기자의 강연을 인용해 ‘언론’이라 하지 않음은 언론은 접촉 과정에서 필터링되어 수용자에게 도달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한 번 낙인찍힌 송출 채널은 수용자 입장의 필터버블(Filter Bubble)이 발생하여 더 이상의 접촉이 불가능하게 되기에 미디어라 했다.


 반면 콘텐츠를 통해 해당 미디어로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콘텐츠 시장에 불어온 '트롯 바람'이 그러하다. 트로트가 좋아서 틀어놓았다가 보수 종편채널의 뉴스까지 보게 되는 상황은 콘텐츠를 통한 채널 유입이 곧 해당미디어에 대한 수용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매력적인 콘텐츠 개발에도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여론 형성, 그리고 이어진 파급효과를 기대해야 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책 <여론>에서, 민주주의는 오직 사람들이 “우리들 각자가 모든 공적인 일에 관해서 충분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과도하고 실행할 수 없는 허구”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여론, 14쪽)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충분히 사안을 들여다보고 숙고할 시간이 없다. 소스타인 베블런 또한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이 하류계급을 보수화 시키는 과정을 비슷한 맥락에서 서술하고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유한계급론, 243쪽)

 

 보수와의 공존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미 미디어 환경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어젠다 세팅과 키핑에서 진보진영은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죽자 사자 싸워도 대등해질까 말까다. 다행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새 운동장이 생겼다.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국내기관의 규제가 닿지 않는 곳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예술사조와 사상적 물결은 기존의 것을 뒤엎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기본 전제로 삼았다. 다행스럽게도 변화와 발전은 진보의 키워드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개량하는 것에 우리는 능숙하다.


자신들이 만든 블랙리스트 예술가였던 봉준호와 황동혁이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각각 세계의 주목을 받았을 때, 저들은 자신들이 뭐라도 도와준 것 마냥 숟가락을 얹으며 뻔뻔한 미소를 보였다. 그 정도 위선은 저들에게 인격인 듯하다. 진보적 마인드는 창조적이다. 보수가 따라올 수 없는 예술적 사상적 딜레마다. 미디어라는 도구로 이익공동체를 이기는 이념공동체의 신화를 만들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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